밤이 아니었다.
낮도 아니었다.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회백색의 공간.
유리는 그곳에 서 있었다.
주위는 텅 비었고, 발밑은 투명했다.
허공 아래로,
수백 개의 ‘현실’들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는 폐허였고, 어디는 번영이었으며,
어디는 반복된 죽음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세계에 ‘유리’가 있었다.
유리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은 문이었다.
선택이라는 이름의 나비가,
그녀의 심장에서 날갯짓을 시작했을 때,
수천의 문이 열렸고, 수천의 자신이 흘러나왔다.
그 앞에, 여섯 명의 유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각기 다른 얼굴을 한 ‘자기 자신’을 바라봤다.
한 명은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한 명은 전투복을,
한 명은 눈물이 굳은 얼굴을,
한 명은 미소를 지었고, 한 명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그녀와 똑같이 생긴 유리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너만 남았어.”
그녀는 말했다.
“네가 이 문을 닫지 않으면,
우리는 이 현실을 무너뜨리고,
가장 강한 하나로 겹칠 거야.
그건 너일 수도, 나일 수도 없어.”
유리는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해?”
“아니.”
눈물자국의 유리가 속삭였다.
“우리는 살아. 항상. 하지만… 같이 살 순 없어.”
중심 유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수백 개의 가능성과 동시에 접속되어 있었고,
그중 몇몇 유리들의 기억과 감정,
사랑과 후회를 모두 느낄 수 있었다.
한 유리는 도현을 구하기 위해 이 문을 열었다.
한 유리는 끝없이 자살을 반복하며 세계를 전환했다.
한 유리는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한 유리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모든 선택을 견디고 있었다.
그 유리가 지금 여기에 있었다.
유리.
“난 이제 알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심장’인지.
왜 내가 선택받았는지.”
모두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감당할 수 있어서가 아니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지금, 처음으로 ‘선택’을 할 거야.”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손끝에는, 어릴 적 봤던 나비의 문양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반복되던 그 문양.
실험 장비 위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것.
그 문은, 지금 그녀의 안에 있었다.
“나는…
우리를 모두 인정할 거야.
너희는 나고, 나는 너희야.
우리는 함께 존재해야 해.”
그 순간, 여섯 명의 유리가 동시에 눈을 떴다.
그들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빛이 되었다. 기억이 되었다.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유리의 심장 속으로 되돌아갔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의 방이었다.
새벽 4시 19분.
거울은 깨끗했고,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전자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포트를 들었다.
이번엔, 떨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