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하진의 온기
《잿빛 나비》
5화. 하진의 온기
하진은 늘 일정한 거리에서 은서를 바라보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마치 누군가의 꿈이 깨어나지 않도록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야 하는 순간처럼.
**
처음 은서를 다시 만난 건
서은의 실종이 한참 지나고 나서였다.
은서는 말이 없었고, 눈빛은 더 깊어져 있었다.
무너진 게 아니라,
이미 무너지고
남은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 같았다.
하진은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조언도, 위로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작은 보온병을 건넸고,
짧은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 “따뜻한 걸 마셔야 해.”
“바람이 좀 불어.”
“오늘은 괜찮아?”
대부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은서가 메시지를 읽는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
그날도 그랬다.
폐역 앞에 선 은서를 보고,
하진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섰다.
“괜찮아?”
그가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서지도 않았다.
그건 하진에게 충분한 대답이었다.
**
하진은 때때로 자문했다.
왜 자신은 여전히 이 자리에 있는 걸까.
왜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걸까.
사랑일까? 연민일까?
아니면 그냥 함께 기억된 사람으로 남고 싶은 걸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건,
은서가 예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누군가의 겨울을 같이 견디는 일엔
정해진 이름이 없었으면 좋겠어.”
“이름이 없으면, 그 감정이 덜 아픈 것 같거든.”
하진은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름 없는 마음,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체온.
**
은서가 ‘집이었던 곳’에 갔던 날.
그는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은서의 목소리는 어딘가 얼어 있었고,
하지만 그 끝엔 아주 작게, 녹아내리는 기운이 있었다.
“나 이제 돌아갈게.”
그 말 속에 하진은 봄이 스치듯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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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그는 혼자서 폐역 근처 언덕을 찾았다.
손에 들린 건 작은 손전등과, 두 병의 캔커피.
바람이 불었고,
풀들은 마른 몸을 흔들며 웅크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서서, 하진은 생각했다.
‘언젠가 이 자리에 은서도 다시 올까.’
그럴 날이 올까.
그녀가 걷는 길 어디쯤에
자신이 조용히 스며들 수 있기를.
하진은 조용히 캔커피를 바위 위에 올려두고,
자리를 떠났다.
그건 기다림이 아니라,
그녀를 향한 작은 온기 하나의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