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강아지가 투정이 많아졌다. 올해로 16살이 됐는데도 한결같이 막내이자 아기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까. 노견이라는 사실을 자주 간과한다. 나이가 들어서 투정이 많아진 걸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꾸만 감각이 무뎌져 간다. 그런 모습을 문득 알아차리게 되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어떤 느낌을 받아야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20대의 한자락엔 새해를 맞아 시간 맞춰 연락처마다 안부를 돌렸다. 이제는 직장 생활에 감사했던 분들께 일괄 메일을 드리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나름의 의례를 치뤄서일까. 오히려 가까운 이들에게 쏟는 에너지는 멀리 뻗치지 못했다. 단톡방에 누군가 새해인사를 건네면 같이 호응하며 덕담을 건네는 정도. 시골에 계신 할머니께 짧은 통화를 전하고, 마주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쯤. 그러다 감사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떤 것들은 놓치게 되었다.
새해가 며칠 지난 후, 작은 아버지 댁엘 갔다. 재작년 같은 동네로 이사오셔서 사실 마음먹으면 금방 찾아뵐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하고 상상 속으로만 벌써 여러 번 식사를 같이했다. 더 마음이 쓰이는 이유는 우리 아버지의 쌍둥이셔서, 삼촌일 때부터 나를 많이 예뻐해 주셔서. 할머니 장례식에서 나는 자식도 없으니 라며 말끝을 흐리시는 모습에 조카도 다 자녀이니 내가 작은 아빠의 딸이라며 한 말이 자꾸만 떠올라서. 오랜만이라도 30년은 훌쩍 넘게 봐온 조카딸에게 용돈까지 쥐어주시는데 온통 무뎌지는 것이 노화라면, 무뎌지면 안 될 감각까지 잃게 될까 겁이 난다.
한때 친했으나 잘 연락하지 않던 친구에게 오래간만에 연락이 왔다. 반갑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에게 무언가를 얻어가고자 함은 아닌지. 텀이 긴 밋밋한 안부를 몇 번 주고받은 뒤 친구의 암진단 소식을 알게 된다. 암을 진단받고 수술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에 그래 요즘 암이 예전 같지는 않지, 했다. 그리곤 천천히 다시 회로를 굴리니 이게 아니다. 아무리 덤덤해지는 것이 나이 듦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어떤 것들은 내내 귀히 여겨야 하고, 선택적으로 무뎌지지 말아야 한다.
일상이 잘 굴러가도록 스스로를 살피는 일에 벅차, 쉬이 뒤로 밀어두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모두를 살필 수 없겠으나 생각이 날 때마다, 떠오를 때마다 감사함을 가지고 너무 오래 잊지 않고 관계를 잇고자 노력해야 함을.
나는 누군가의 바늘을 삼켰다는 표현에도 목이 따끔거리는 사람이다. 그 에너지가 나라는 존재를 자꾸 닳게 하기에 조금씩 아끼고자 했던 것이 나를 괴팍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나와 타인의 경계. 그 사이를 잘 오가고 싶다. 나에게도 다정한 일이, 누군가에게도 다정한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나에게 얄궂은 일이 타인을 위한 일이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일이 나에게 소홀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 사이 경계를 잘 다루는 것이 관계의 관건이겠다. 하지만 그 경계라 함은 사람마다 달라 늘 고민스럽다. 이에 정답을 없겠으나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나의 성심을 다하겠다.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음은 거짓이 아니며, 건네는 눈빛과 온기의 말들은 진심이다. 그 모든 마음과 말들이 가닿지 못하더라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으려 했다는 마음을 여기 남겨둔다.
다시 우리 집 강아지를 한번 더 쓰다듬어 달래고, 생각이 나는 대로 안부를 묻고, 경계보다는 감사와 수용의 마음으로 고쳐 앉는다. 그럴 수 있게 하기 위한 나와의 시간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좁아진 마음의 품 따위가 허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후회보다는 깨어남을 반복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