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겹겹이 쌓인 꽃이 좋았다. 라넌큘러스 같은. 한 겹 한 겹의 아름다움을 쥐고 있는 듯했다. 피어나는 동안 만발할 것을 예고하는 듯한 것이 좋았다. 꽃말 또한 매력과 매혹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처음 꽃을 알기 시작한 20대 초반이었다.
꽃잎이 많아 꽃대가 부러지기 쉽고 햇빛을 많이 받아야 잘 자라는 것이 그 때의 나와 닮았다. '비난하다'는 꽃말 또한 가지고 있는데 젊음이란 꽃잎으로 무장하고 감추고 시기했던 모양새가 꼭이다.
이후에는 카라 꽃이 좋았다. 기개를 갖춘 우아함에 매료되었다. 손을 뻗어 아름다움을 말하는 듯 단조로운 하나의 잎으로 결을 그리며 순수의 세계로 이끄는 듯한 모양이. 하나의 줄기로도 말할 수 있는 힘이 멋졌다.
카라는 송이와 다발의 꽃말이 다른데, 원래 꽃말이 '순수'라면 카라 꽃다발은 '당신은 나의 행운입니다.'라고 한다. 그 무렵의 나는 혼자보다는 함께하는 시간에 가치를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오밀조밀 핀 데이지가 좋았다. 들꽃처럼 여기저기 핀 것이, 함부로 아름답고 문득 피어난 웃음처럼 좋았다. 그 무렵 말하고 다니지도 않았는데 친구에게 나와 닮았다며 데이지를 선물 받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잔잔하다. 꽃말은 희망, 평화, 사랑스러움, 숨겨진 사랑, 겸손한 아름다움.
최근에는 튤립을 좋아했다. 단단한 줄기와 봉우리를 가지고 색색의 꽃잎의 힘 있는 아름다움이 대견하고 부러웠다. 색이 많은 만큼 저마다 꽃말도 다르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진 것에 기분이 좋다.
꽃이야기를 이렇듯 늘어놓는 것은 길을 걷다 우연히 꽃가게 안의 꽃을 보고 예쁘다 멈춰섰다. 가만 생각해 보니 시기에 따라 좋아하는 꽃이 달랐구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시기마다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달랐다.
막 피어났을 무렵, 그러니까 20대에 접어들고 가능성과 우연성에 기대어 들떠있었다면, 이후에는 한 사람으로서 중심을 잡고 품위와 무게를 갖추는 것에 선망이 있던 듯하다.
그것보다는 좀 더 소탈한 일상의 행복들을 줍고 나누고 싶었으며, 그 안에서도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삶의 중심을 견고하게 잡고 싶었다. 이제는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는지 어제 본 그 꽃을 들여다보며 찾고 싶다.
다시 자연스러운 변화의 시기다. 내일은 그 꽃집에 들러 이름을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