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 Jan 20. 2016

딸. 행복도 아끼다 똥된단다.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34

밤늦도록 쇼핑앱을 기웃거렸다.


매일 일어나는 아침인데 요즘들어 부쩍 힘이 들었다. 눈은 물기없이 뻑뻑했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유는 내가 잘 알았다. 밤늦도록 스마트폰으로 쇼핑앱을 들여다 본 탓이다. 부쩍 피부가 까칠해진 것 같아 수분크림을 열심히 검색했다. 일교차가 큰 것 같아 가디건을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너저분한 내 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뭐라도 들여놔야겠다고 싶었다. 사야 할 게 열 손가락으로도 다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니 내가 밤에 잠을 잘 수가 있나. 뚱뚱해진 장바구니를 보며 '이건 아니다' 싶어 폰을 덮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어둠 속 허연 불빛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한다. "이것만 있다면 참 좋을텐데." 내게 없는 것, 새로운 건 언제나 매력적이다. 



오랜만에 방을 정리했다.

5년 된 로션이 나왔다.


찌뿌둥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도 내 행선지는 어김없이 침실에서 3m 떨어진 내 방, 내 오피스다. 방문을 열자마자 어젯밤 3시간 쯤 들여다본 인테리어 소품이 생각났다. 그걸 저기다 걸면 괜찮을텐데, 바로구매를 눌렀어야 했나. 우중충한 분위기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단 구석에 쌓인 상자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상자가 대뜸 눈에 들어왔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뚜껑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벌레 무리를 잠시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열어젖혔다. 왠걸. 화장품이다.



"나한테 이런 게 있었나."

아이섀도우, 바디오일, 아이라이너, 마스카라까지. 반도 채 쓰지 않은 화장품 용기들이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압권은 이 녀석이었다. 5년 지난 로션. 


"아, 아까워. 왜 이걸 안 바르고 묵혔지."

이젠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로션 앞에서 푸념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끊임없이 쇼핑앱 스크롤을 넘기며 새로운 화장품을 물색하는 사이 정작 내 상자 속 로션은 똥이 되버린 거다. 비단 화장품 얘기만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지닌 행복 vs

지금 내가 갖고 싶은 행복


자고로 남의 떡은 더 커보이고, 내 손에 쥔 떡은 그저 그런 모양이다. 요즘 내 마음이 그랬다. 외국에 나와 사는 게 녹록치 않았다. 떠들썩한 동료들과의 불금도, 주전부리가 가득한 길거리 풍경도 그리웠다. 언제든 누울 수 있는 엄마의 무릎도, 말 잘 통하는 동네 아기 엄마들과의 수다도 그리웠다. 나 홀로 여행은 그립다 못해 간절했다. 지금 내가 가지지 못한 그 행복을 매일 상상했다. 매일밤 어둠 속에서 새 옷, 새 화장품을 응시하던 그 느낌이었다. 


이젠 똥이 되어버린 로션병을 한참 만지작 거렸다. 바닥엔 제조일이 적혀 있었다. 


20110711


내가 2011년 여름 무렵에 이걸 샀겠구나. 그 때 나는 뭘 하고 있었지? 아이를 낳기 전이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2년차 햇병아리 직장인이었겠구나. 이리저리 부딪히며 사회가 녹록치 않단 걸 알아가던 즈음이다. 그런데 가만 있어보자. 그 땐 불금, 주전부리, 엄마의 무릎- 수다 떨 친구와 여행까지. 지금 내가 바라는 모든 게 있었네? 그 땐 행복했었나?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는 것처럼 그 행복 속에 그게 행복이란 걸 몰랐다. 그리고 그 행복은 마음껏 써보지도 못한 채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지금 내 삶의 신상 행복

가족, 여유, 아이 그리고 일


어디서 주워들은 대화가 떠올랐다. 


"할머니가 되서도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줄 알아?"

"어떤 사람인데? 돈 많은 사람?"

"아니. 소녀때도 행복했던 사람."


대화를 전해 들으며 무릎을 쳤다. 어떤 상황에서든 '지금의 행복'을 발굴하고 만끽하는 재주를 당할 자는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똥 된 로션을 손에 쥐고 가만히 생각했다. 내게 '지금의 행복'이란 무얼까. 


이 곳에서 나는 저녁도, 가족도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 두 살된 딸의 애교에 애간장이 녹아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 아직 유통기한이 한창인, 나의 신상 행복 목록이다. 


언젠가 이 행복도 유통기한이 다하는 날이 올 걸 안다. 5년 쯤 지난 어느 날엔 딸이 엄마보단 친구와 노는 걸 좋아하게 될 거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더 이어가지 못할 가능성도 높다. 지금처럼 남편과 오붓하게 즐기는 하루 3끼의 여유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래서- 더욱 더 지금의 이 행복을 만끽해야 한다. 아끼고 묵히다 똥되기 전에. 



먼지 앉은 그림을 벽에 붙였다.

새것이 아니라도 좋았다.


또 다른 상자 속에서 먼지를 피하고 있던 그림뭉치를 꺼냈다. 아가씨 시절 여행하며 모은 그림들이다. 지난 밤 눈에서 피가 나도록 검색했던 '북유럽식 인테리어 소품' 대신 이 녀석들을 벽에 붙였다. 삐까뻔쩍하진 않았지만, 내 눈엔 어여뻤다. 그려. 지금 지닌 것을 만끽하자. 그림이든 화장품이든- 행복이든. 



매거진의 이전글 딸. 함무니가 그렇게 좋으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