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 Jan 21. 2016

딸. 엄마는 널 위해 희생하는 게 아냐.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35

난 나의 시어머니가 좋다. 


사람 관계에 있어서 난 꽤 운이 좋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내 남편의 어머니, 나의 시어머니다. 5년차 며느리로서 난 어머니를 꽤 좋아하고 존경한다. 한국적 사고에 의하면 고부 사이에 참 드문 감정이다. 더군다나 난 어릴 적부터 고부 관계의 불합리함을 보며 자랐다. 굳이 <사랑과 전쟁>을 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굳어진 편견을 깨주신 게 나의 시어머니다. 그 과정은 가랑비 옷 적시든 천천히 진행되어 왔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분명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나의 결혼식 날이었다. 



"아들. 그동안 아들 키우며 행복했어."


그 날. 곱게 단장한 남편을 꼭 안으시며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기분이 참 묘했다. 그 기분의 뿌리를 깨달은 건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이었다. 첫째론 자식을 키우며 '내가' 행복했다는 주인공 시점이 그랬다. 둘째론 그동안 한 것이 '희생'이 아닌 '행복'이라 그랬다. 지난 30년 간 내 머릿속에 박혀 있던 전형적인 엄마의 감정과는 정확히 반대였다.  삶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 '자식'이었던, 행복이 아닌 '희생'이었던 삶. 그게 보통 엄마의 삶일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이를테면 이런 말. 


"너 키우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참 무서운 게 보고 듣고 자란 문화고 편견이다. 얼마 전 복직과 함께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엄마가 일한답시고 저 쪼끄만 애기를 떼어놓았다는 사실에 위축됐다. 나 역시 은연 중에 아이를 위한 '희생'이 엄마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모르지 않는다. 그 '희생'이란 단어 자체가 잘못됐단 걸. 



아이를 키우는 것이 

희생이 아닌 4가지 이유 



1. 아이를 낳은 건 내 선택이다.


"나 이제 태어날 거니까 하루에 3시간만 자고 내 수발 좀 들어줘요. 2시간에 한 번 씩 깰 거니까 각오하구. 쉬야랑 응아는 시들때도 없이 할 거니까 언제든 스탠바이하고 있어야 되는 거 알죠?" 

라고 내 아이는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날 낳아주세요."라고 일언반구 한 적 없다. 그런데 나는 아이를 낳았다. 내가 좋아 낳고 키우는 것이니 일단 희생의 트랙은 아닌 셈이다. 


2. 난 되로 주고 말로 받고 있다. 


아이는 자기 전 침대에서 한참을 뒹굴거리며 남은 체력을 소진한다. 그동안 난 주로 말도 안되는 산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오늘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다. 그마저도 떨어지면 그냥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늘어놓게 된다. 한 가지 신기한 건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그 말이 대개 딸을 향한 고백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고마워. 오늘 딸이랑 손잡고 장봐서 엄만 너무 좋았어."


이건 사실 비밀이다. 사실 ...... 빚은 내가 아이에게 지고 있다. 아이가 꺄르르 웃을 때마다 하루씩 젊어지는 기분이다. 아이가 기저귀 찬 엉덩이를 흔들며 씰룩씰룩 춤이라도 춰주면 이 세상이 내 것 같다. 아이의 존재 자체로 주는 게 이렇게나 크다. 하지만 나중에 달러로 환산해서 갚으라고 할 지도 모르니 이건 그냥 또이또이 퉁 치는 걸로. 


3. 희생이라 생각하는 순간, 내 삶을 못 산다.


희생이란 단어가 참 무서운 것이, 그 안에 '타인을 위한 삶'이 내포되어 있다. 


엄마는 아낌없이 내어주기만 하는 화수분이 아니다. 반드시 누리고 싶은 그만의 행복이 있다. 하지만 이를 엄마라는 이유로 포기해야 한다면 나의 삶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희생' 말고 '선택'을 할 때 행복의 스펙트럼은 넓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아이를 위해 내 커리어를 '희생'하는 것과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내 시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어디까지나 내 삶의 주체는 나다. 그리고 그 삶을 '행복하게 살' 책임이 '희생할' 책임에 훨씬 앞선다고 믿는다. 행복한 엄마를 보고 자란 아이가 행복한 사람으로 크는 법이므로. 


4. 슬프지만 엄마의 희생은 아이의 짐이다. 


내 아버지는 평생 할머니에게 빚진 채 사셨다. 고생하며 삼형제를 키우신 할머니에 대한 마음의 빚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힘겨웠던 그 시절, 모든 이들의 아픈 이야기다. 오랜시간 아빠는 효자였다. 하지만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지쳐보이셨다. 이 세상 누가 사랑하는 이가 나로 인해 힘들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내 행복을 찾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사실 엄마만의 문젠 아니다. 

부모의 이야기다. 


근래 방영된 SBS <엄마의 전쟁>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안타깝게도 그 생각의 십중팔구가 '답답함'이긴 했지만. 지난 주 방송에 소개된 네덜란드 거주 가족의 이야기도 그랬다. 뭐 출발은 좋았다. 네덜란드에선 파트타임으로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하여 아이를 이만큼 여유롭게 키울 수 있다는 이야기까진 참 훈훈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점이 이상하게 찍혔다. 그 가족의 아빠가 이런 인터뷰를 한 거다. 



"여기는 남자가 희생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에요."


순간 마음의 정적이 깨졌다. '희생'이란 단어에서 한국에 살든 네덜란드에 살든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엄마의, 엄마에 의한, 가족을 위한 육아'라는 프레임이 드러나 버린 거다. '희생'이란 단어가 이렇게 무섭다. "엄마가 널 위해 희생했어."란 말엔 두고두고 갚아야 할 마음의 짐이 내장된 것처럼 "제가 아내를 위해 희생했죠."란 말엔 원래는 육아가 '아내'의 몫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처음부터 부부가 같이 내린 선택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이야기가 샜다. 다행히 나의 남편은 나나 아이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일하는 아내와 함께 딸을 키우며 가족이 포함된 자신의 삶을 즐긴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잠투정하는 딸의 머리맡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줄 수 있다.


"딸. 엄마랑 아빠는 딸이 있어서 엄청 좋아. 굿나잇."

매거진의 이전글 딸. 행복도 아끼다 똥된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