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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Feb 03. 2016

당신에겐 삶을 누릴 자격이 있어요.

뉴질랜드에서 만난 장애인 그네 이야기

여행길, 아주 커다란 그네를 만났다. 


뉴질랜드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3년이 다 되어 간다. 나고 자란 곳이 아닌지라 여즉 하루에도 몇 번 씩 생소함을 느낀다. 지난 연말 남섬 여행길도 그러했다. 


크라이스트처치였던가. 그 날 일정을 얼추 마치고 숙소로 향하던 길에 놀이터 하나를 만났다. 참새같은 우리 딸에겐 방앗간이 따로 없었다. 딸은 시소와 미끄럼틀을 바삐 오가며 놀았다. 내 시선이 아이를 지나 그 옆 그네로 닿았다. 아주 큰 그네 하나가 눈끝에 걸렸다. 놀이공원에서 봤던 어린이용 바이킹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으로 향했다. 



내 예상은 틀렸다. 이 그네는 바이킹이 아니라 휠체어 그네였다. 생경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그네를 타는 장면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네 뿐일까. 마트, 거리, 영화관, 도서관. 내가 누리는 그 모든 것의 풍경에서 그랬다. 당황한 내가 그네도 참 당황스러웠을 터. 그네가 날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누구든 삶을 누릴 자격이 있지 않소. 

내 말이 틀렸는가."


아이는 태어나 집 다음으로 놀이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 커다란 그네를 보며 자란 아이들에겐 이게 당연한 풍경이 된다. 누구든 삶을 누릴 자격이 있는 풍경. 



내 아이는 자폐증을 가진

아이와 함께 어린이집에 다닌다.


여행에서 돌아와 아이는 이 곳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어린이집을 둘러본 첫날, 소파에 혼자 앉아 멍하게 있는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또래 아이와는 뭔가 다른 모습이었다. 내 눈길을 눈치챈 선생님이 아이를 소개했다. 자폐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아이는 모두 그러하듯 어린이집에서 논다. 그 아이를 대하는 다른 아이들도, 선생님도 그저 자연스러웠다. 그 풍경을 어색하다 느낀 건 오로지 나 하나였다. 



마트에서 만난 민소매 아가씨는

왼쪽 팔꿈치 아래 팔이 없었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의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다 눈을 부볐다. 뭔가 잘못 봤나 싶었던 거다. 짧은 민소매 탱크탑을 입은 아가씨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차 앞을 지나갔다. 훤히 드러난 그녀의 왼쪽 팔꿈치 아래가 텅 비어 있었다. 눈을 몇 번 더 깜빡이고 나서야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아가씨는 잘린 팔을 숨기지 않았다. 모두가 그러하듯 더운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그 누구도 수근거리지 않았다. 서둘러 시선을 거두며 몹시 부끄러웠다. 



장애, 가난, 실패가 '끝'이 아닌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삶. 


그들의 장애가 어찌 아프고 힘겹지 않았을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삶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굳이 '장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장애' 대신 '가난', '실패', 지금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어떤 단어를 대입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회에선 '장애', '가난', '실패'라 쓰고 '끝'이라 읽는단 걸 안다. 하지만 이 곳에선 그걸 '끝'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읽는다. 


장애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큰 실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겐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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