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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Aug 11. 2016

세살 약속 여든까지 가도록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38

아이가 엄마만 찾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날부터 잠들 때면 아이가 엄마만 찾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아빠가 아기 동물 이야기를 아무리 늘어놓아도 소용없었다. 아이는 계속 말했다. "엄마랑 잘래!" 할머니와 아빠는 내심 서운한 표정으로 백기 투항했다. 그 손을 잡고 방에서 나온 아이는 기어이 내 손을 잡고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갔다. 아기 사자가 아기 토끼랑 친구가 된 이야기, 아기 호랑이가 아기 부엉이 2번째 생일 잔치에 들고 간 선물 이야기를 23개 쯤 늘어놓으면- 아이는 쌔근쌔근 잠들었다. 입 언저리가 뻐근하고 안에선 단내가 났지만 기분 좋았다. 그 옆에 누워 자는 잠이 참 달았다. 하지만 그 단잠보다 더 달콤한 유혹이 있었으니, 야구였다. 하필 어제는 내가 응원하는 팀이 무척 중요한 경기를 치렀다. 슥- 침대에서 빠져나와 아이의 할머니와 바톤터치했다.  


...

팀은 졌다. 기분이 꿍꿍한 일은 아침에도 이어졌다. 



아이의 대성통곡과 함께 아침이 밝았다. 


"으앙" 


옆방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 소리가 온 식구를 깨웠다. 엉엉 우는 아이를 안고 할머니는 무척 난감한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바톤터치할 차례다. 아이의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다. 


"무서운 꿈 꿨어? 호랑이가 원이한테 어흥-했어?"


잠을 설게 자면 늘 보채던 아이라 이번에도 그런 거라 여겼다. 아이는 콧물 고인 인중을 잠옷 소매로 닦으며 서럽게 말했다. 


"어떡하지? 엄마랑 약속했는데, 할머니랑 잤네? 어떡하지?"


'응? 무슨 약속... 아, 아뿔싸.'



아차, 아이와 새끼 손가락을 걸었던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건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동물 이야기를 의식의 흐름대로 늘어놓는 즐거움은 또 어떻고. 말도 안되는 그 이야기에 진심으로 반응하는 아이의 추임새를 듣고 있자면 내가 셰익스피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했다. 난 아이를 재우는 일이 좋았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아이가 할머니와 잠드는 일이 익숙해져갔다. '엄마는 출근해야 하니까.'


언젠가부턴가 할머니 손을 잡고 빠이빠이 하고 돌아서는 아이의 뒷모습에 혼자 서운해 했다. 


며칠 전, 거실 카펫 위에 누워 아이와 둘이 누워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실없이 철없이 물었다. 


"원이는 누구랑 자고 싶어?"

"함무니랑!"

"원이 엄마랑 잘까?"

"함무니랑!"

"에이~ 엄마는 원이랑 자고 싶어~ 원이 엄마랑 자자!"


딴청을 하던 아이가 손가락을 걸었다. 철없는 엄마는 꺄르르- 하며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잊었다. 그 약속을 아이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어른이, 아이가 이렇다. 



아이가 세살 약속 여든엔 안 지킨다면, 그건 내 탓이다. 


장난감 코너에서 드러 누운 아이를 달래려 그랬다. "다음에 사줄게. 엄마가 약속."

숨겨 놓았던 사탕을 발견하고 달려온 딸에게 그랬다. "밥 먹고 줄게. 엄마가 약속."

주사기를 무서워하는 딸에게 그랬다. "의사 선생님이 하나도 안 아프게 해주실거야. 엄마가 약속."


수 많은 약속 중 난 몇 개를 지켰을까. 지켜지지 않는 새끼 손가락이 늘어날수록 아이에게 약속은 참 힘없어 지는 건데.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자.

지킬 수 없게 된다면, 꼭 미안하다고 말하자. 

사탕을 미끼로 내키지 않는 새끼 손가락을 걸게 말자. 


내 삶이 아이 인생의 밑그림이 되고 있단 생각을 오늘도 하게 된다. 

허투루 살아선 안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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