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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Aug 12. 2016

명사형 꿈 vs 동사형 꿈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39

어떤 동화책이 말했다. "우리 엄마는 최고야!"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앤서니 브라운이란 동화작가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휴직 기간에 아이와 마트 다음으로 많이 갔던 동네 도서관. 널브러진 책 더미 맨 위에 그의 책 <My Mom>이 있었다. 표지 그림에서 풍겨오는 따뜻함이 좋아 별 생각없이 집어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정말 멋져요, 우리 엄마에요!

엄마는 정말 엄청난 요리사구요.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힘센 사람이에요! 정말 멋지죠?

엄마는 천사처럼 노래도 부르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기도 해요. 

엄마는 나비처럼 이쁘고, 소파처럼 편안해요. 

엄마는 날 웃게 해줘요. 

나는 엄마를 사랑해요. 그리고 엄마도 날 사랑해요. 영원히 그럴 거에요.


우쭐했다. 아이에게 내가 그렇게 멋진 존재라니. 내친김에 <My Dad>를 집어들었다. "아빠는 진짜 짱이에요!"가 반복되는 그 책을 남편은 마르고 닳도록 아이에게 읽어줬다. 행복해보였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동화책 작가 중 한 명이란 사실은 얼마 전 한국에 와서야 알았다. 마침 예술의 전당에서 <앤서니 브라운展>이 열리고 있었다. 놓칠 수 있나. 무더위와 먼 길, 수많은 인파를 뚫고 그 어려운 전시회 관람을 내가 해냈다. 



일단 한줄평 : "그간 그의 책에서 '따뜻함'을 느꼈다면, 그의 전시회에서 느낀 건 '그의 꿈'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병원에서 폐나 간을 그렸다.


그의 미공개 작품도 여럿이었지만, 그보단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그가 처음(?)부터 동화작가는 아니었단 것. 그는 젊은 시절 '쥐'나 사람의 '폐', '간'을 그렸다. 쉽게 말해 의대생들이 수술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메디컬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는 게 그의 첫 직업이었던 것. 


쥐 해부도 Drawing of a dissected rat, 1968 : 메디컬 일러스트레이션 면접을 위해 그가 준비했던 해부도다.


그가 말했다. 


"미술대학에서보다 이 시절에 드로잉와 그림에서 이야기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가 가진 다음 직업은 고든 프레이저의 '카드' 삽화가. 그 시대엔 보편적이었을 생일카드나 연하장같은 인사 카드를 그리는 일이었다. 


고든 프레이저의 카드 일러스트레이션, Greetings cards, 1979


"병원에서의 세밀화 작업은 정교하고 많은 사실이 담긴 그림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카드 작업을 통해서는 나중에 제 그림책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캐릭터들의 원형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카드 일러스트에서 만난 고릴라가 반가웠다.)



그는 사는 내내 그렸다. 


시끌벅적한 전시회장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어리고 젊었던 시절의 앤서니 브라운을 상상해봤다. 그림을 그릴 때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어린이가 미술학교에 갔다. 졸업 후 그림을 그려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찾아 3년 쯤 쥐도 그리고 사람의 폐, 간도 그리는 메디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다. 그 다음엔 십년 쯤 연하장 삽화가로 살았다. 그 후 어쩌다 동화책을 내게 됐고, 그게 삼십년 째 직업이 됐다.


그는 사는 내내 그렸다. 행복하게. 직업의 이름은 자꾸 바뀌었지만 뭔갈 '그린다'는 건 바뀌지 않았다. 되려 직업의 갯수만큼 그의 그림은 튼실해졌다. 감히 추측해보건대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닌 동사가 아니었을까. 이 손으로 뭔갈 '그리고' 싶다는. 



나도 사는 내내 쓰고 싶다.


내가 기억하는 내 첫 글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쓰여졌다.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어떤 동시를 베껴썼다.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던 선생님 덕에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게 전국민이 다 아는 동시였단 건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방학 때 쓰는 일기가 숙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대학 때 참 많이 여행 하며 참 많이 썼다. 드라마 작가나 여행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그때 쓴 여행기로 추천을 받아 대학원에 갔다. 그곳에서 여행기를 보고 내게 끌렸다는 남자와 결혼했다. 글쓰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때는 수필가가 되고 싶었다. 어쩌다보니 아르바이트를 했던 회사에 취직했고, 마케팅 페이퍼를 쓰며 7년 째 일하고 있다. 


생각했던 직업의 이름은 자꾸 바뀌었지만 뭔갈 '쓰면서' 살고 싶었던 건 한결같았구나. 어쩌다보니 남의 돈 받아먹으며 좋아하는 일까지 하고 있다니. 내 인생이 고마워졌다.



내 아이도 '움직이는 꿈'을 꿨으면


내 아이의 꿈이 처음부터 '의사'나 '교사'는 아니였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아프지 않게 하는 게 좋아서 할머니 안마도 하고 로봇다리도 테이프로 감고 하다 보니 의사가 된다면 좋겠다. 내가 아는 걸 남들에게 가르쳐주는 게 신나서 학교에서 배운 덧셈을 동네 꼬맹이들한테 알려주기도 하고 어젯밤 지어낸 공룡이야기를 엄마에게 들려주기도 하다 보니 선생님이 되버리면 좋겠다. 무엇이 되어도 좋다. 그냥 좋아하는 뭔가를 '하면서' 살면 좋겠다. 


처음부터 꿈이 '의사'나 '교사'라는 직업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그 꿈은 그 직업이 적힌 명함을 파는 순간 멈추거나 그 직업을 갖지 못해 실패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꿈이 '동사'라면,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꿈을 꾼다면 어떨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이상 그 인생은 멈추지도, 실패하지도 않는 거다.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이게 아닐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좋아하는 일에 진심과 최선을 다 할 줄 아는 아이로 크게 돕는 것. 


그렇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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