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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Aug 17. 2016

많은 것을 좋아하는 삶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40

겨울바다에 뛰어들어 전복을 잡았다. 


이 곳은 겨울이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 무더위와 씨름하는 동안 난 일곱 겹 쯤 옷을 껴입으며 추위와 싸우고 있다. 한국의 살을 찢는 추위와는 다르다. 이 곳에 사는 한국인들 표현으론 '기분나쁘게 으실거리는' 추위다. 이런 날씨엔 대개 집에 콕 틀어박혀 극세사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며 홍합탕 끓여먹을 궁리나 하는 것이 정답. 하지만 며칠 전부터 요상하게 눈 앞에 하나의 생명체가 둥둥 떠다녔다. 전복, 전복 그래 너 전복. 



뉴질랜드 전복은 한국 전복과 신분이 사뭇 다르다. 전복에겐 다행이랄까. 이 곳 사람들은 전복을 즐겨 먹지 않는다. 어쩌다 레스토랑에서 전복 메뉴를 낸다 해도 우리네 상상과는 전혀 다른 비쥬얼을 맞닥뜨리게 된다. 믹서기로 잘게 갈아 탱글탱글한 속살일랑 찾아볼 수 없기 때문. (햄버거 패티처럼 뭉쳐서 납작하게 구워 나온다.) 전복이 지천인 나라에서 내가 원하는 그 쫄깃 담백한 식감을 맛볼 수 없다니 이리 한스러울 수가.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그 길로 전복칼을 샀다. 날 좋은 여름에야 뭐가 문제일까. 수영복 한 장 걸치고 슬금슬금 들어가 바위를 더듬더듬 거린다. 출렁거리는 물 속이 제대로 보일 리 없다. 눈이 아니라 손으로 찾아야 한다. (지름 12.5cm가 넘는 녀석만 잡아야 한다. 대략 내 손바닥 크기다.) 작은 녀석을 손짐작으로 탈락시킨다. 봉곳이 솟은 월척이 손바닥을 꽉 채우는 그 순간, 온 몸에 이름 모를 호르몬이 돌기 시작한다. 오른손에 잡고 있던 뭉뚝한 칼을 전복을 움켜쥔 왼손의 좌표로 향한다. 몇 번 더듬거려 바위와 전복 사이의 틈을 찾는다. 힘센 전복이 젖먹던 힘으로 달라붙어 있어 그 틈을 찾는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제아무리 전복이 용을 쓴다 한들 모든 바위 표면과 찰떡 궁합일 수 있을까. 틈은 반드시 있다. 그 틈에 칼끝이 탁- 하고 걸린다. 이름모를 전복에게 쏘리를 읊조린 후 칼로 틈을 파고든다. 칼끝이 손가락 반마디 쯤 들어가면 한 단계만 남는다. 칼을 지렛대 삼아 레버를 당기듯 내린다. 찰싹 달라붙어 있던 전복이 뽁-하고 떨어져 나온다. 희열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다. 아주 잠깐 바닷물을 헤엄치는 녀석을 재빨리 낚아챈다. 적을 벤 장수가 그러하듯 다음 전복을 찾아 나선다. 


이런 나를 구경하는 남편은 아주 웃겨 죽으려 한다. 인정한다. 그럴 만하다. 


차갑기로 유명한 뉴질랜드의 겨울 바다다. 조금이라도 덜 추우려 내 복장은 희한하기 그지없다. 발등엔 비닐랩을 꽁꽁 싸매 대일밴드로 봉했다. 거기다 한국에서 가져 온 고무신을 신었다. 물이 새지 않는(다고 했으나 다소 샌) 웻수트를 입었다. (그 안에 히트텍을 아래 위 세 겹씩 입었다.) 딸아이 목도리를 깁스마냥 둘러맸고, 딸래미 모자도 꾸역꾸역 우겨서 썼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는 빗자루를 연상시킨다. 그런 모습으로 한 손엔 칼을 한 손엔 타파통을 들고 겨울바다로 용맹하게 전진하는 꼴이라니. 그 날 난 남편에게 큰 웃음을 줬다. 



모자, 목도리 협찬 : 딸 / 고무신 협찬 : 시어머니 / 전복칼 협찬 : 남편



좋아하는 것이 많아 행복하다.


야구를 좋아한다. 그 중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님을 특별히 좋아한다. 매일 밤 한화 경기를 보며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어떻게든 투수의 공을 쳐내는 용규놀이를 볼 때면 나도 저리 집념을 가진 사람이 되겠노라 열정이 타오른다. 냉혹하기로 이름난 김성근 감독님이 어쩌다 한 번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면 괜히 뭉클하다. 죽을 힘을 다 해 공을 던지는 파김치 권혁을 볼 때면 전복죽이라도 쒀다 주고 싶어진다. 이긴 날엔 '이 기세를 몰아서!' 싶고 진 날엔 '내일은 기필코!'싶다. 그렇게 매일의 경기를 기다린다. 


커피를 좋아한다. 외우기도 벅찬 그런 어렵고 고급진 커피는 잘 모른다. 약간 달달하면서 끝맛이 텁텁하지 않으면 내겐 좋은 커피다. 내가 사는 웰링턴은 실력있는 카페 많기로 유명한 도시.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많지 않은 탓에 모든 카페가 새롭다. 커피란 게 그냥 맛있어서 매력적인 건 아닐터. 커피 한 잔 한다는 건 좋아하는 햇살 쬐며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는 거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일로 가득 채워지는 시간.


요리를 좋아한다. (닭을 맵고 달게 요리하는 걸 특히 좋아한다. 

책을 좋아한다. (마스다 미리와 최규석의 만화를, 유시민과 김형경의 에세이를, 앤서니 브라운의 동화책을 특히 좋아한다.)

여행을 좋아한다. (혼자 하는 여행을 절대적으로 좋아한다.)

일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일로 밥까지 벌어먹고 있으니 싫어할 수가 없다.)

초콜렛을 좋아한다. (아몬드가 들어가면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순간 설렌다.


전복 잡으러 가기 전 날 밤이면 수학여행을 기다리던 마음이 된다. 

야구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시계만 본다.

새로운 카페, 새로운 커피를 주문할 때면 꼭 소개팅하는 심정이다.

이 요리를 먹고 내 가족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면 장볼 때부터 흥이 난다.

새 책을 책꽂이에 꽂을 때만큼 기분좋을 순간이 있을까. 

비행기표를 끊고 책을 사며 여행을 기다릴 때면 주변의 행복이 샘날 틈이 없어진다.

일에 집중하다 하루가 후딱 지나가 버리면, 내가 시간을 이겨버린 것만 같다.

냉동실에 든 아몬드 초콜렛 3개는 긁힐 확률 높은 로또 3개 수준이다.


좋아하는 것이 많은 나의 삶을 좋아한다. 


내 딸은 뽀로로와 페파피그를 좋아한다.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와 '여기여차' 동화책도 좋아한다. 조기와 고등어를 좋아하고, 우유라면 사족을 못 쓴다. 아빠와 함께 하는 자석 놀이, 엄마와 함께 하는 댄스 타임도 좋아한다. 아플 때 먹는 달달한 약을 좋아한다. 자기보다 작은 아가들도 좋아한다. 마당에 놀러온 고슴도치와 고양이도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건 엄마 등에 업히는 것. "업어, 업어."하는 아이를 업고선 "엄마도 원이 업어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고 늘 말해준다. 


아이의 삶에 좋아하는 것이 점점 늘어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좋아하는 일을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큰 어려움 없이 누릴 수 있는 환경에서 살길 바란다. 그 바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좋아하는 게 참 많은 엄마의 삶을 보여주는 거다. 


전복을 잡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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