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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Aug 19. 2016

Re: 사장님. 우리 애 픽업하러 가야 하는데요.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41

Ep 1. "사장님, 우리 애 픽업하러 가야 하는데요."


남편은 이 곳, 뉴질랜드 회사에 다닌다. 퇴근 후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재밌는 일을 들려주곤 하는데, 꼭 <먼나라 이웃나라> 읽는 것마냥 재미나다. 이 에피소드가 특히 그랬다. 


그 날, 오후 3시에 남편에겐 중요한 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사장님도 참석하는 회의였다. 그런데 한 2시 쯤 사장님에게 단체 메일이 왔다. (이메일을 통해 일정을 잡고, 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다.) 


"저기, 내가 일이 생겨서 그런데 4시로 미루는게 어때?"


남편이 그 메일을 다 읽기도 전에 한 통의 회신이 날아들었다. 


"조, (사장님 이름이 '조'다.) 이렇게 갑자기 일정을 바꾸면 곤란해. 나 4시에 애 픽업하러 가야 하거든."


다시 남편이 그 메일을 읽기도 전에 조가 회신했다. 


"앗, 그래? 쏘리. 그럼 3시에 봐."


연애와 결혼을 합쳐 거의 10년을 함께 했건만, 이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조가 그 사람 짤랐어? 슈퍼바이저한테 불려갔어?"


"아니? 그냥 3시에 회의 했는데?"


이 곳에서도 사장님은 힘이 세다. 그의 의사 결정에 수 천 명의 직원이 움직인다. 대개 연간 단위로 계약이 연장되는 터라 윗사람에게 미운털 박히는 건 치명적이다. 심지어 '애'를 데리러 가야 한다는 이유로 일개 직원이 사장님에게 그런 어필을 하다니. 지극히 전형적인 한국인인 나의 사고회로에선 자꾸 에러 메시지가 떴다. 더 놀라운 건 회의에 참석한 그 누구도 이 커뮤니케이션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사실 그 사람 말이 틀린게 아닌게 우리 회사는 한국처럼 9시에 출근해서 6시까지 사무실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잖아. 하루 중 언제가 됐든 자기가 계약한 시간만 채우면 되는 구조니까. 일하다가 애 데리러 가도, 거기에 드는 시간은 빼고 급여 받고. (자기가 일한 시간만큼 주 단위로 급여를 신청하는 구조다.) 그 사람은 떳떳한 거지. 약속을 어긴 건 한 시간 전에 회의 시간 바꾸자고 한 사장님이고."



Ep 2. "왜 그만두냐고? 와이프랑 바톤터치해야 해서."


이 에피소드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옆 부서 슈퍼바이저 회사 그만둔대." 

(이 회사에서 슈퍼바이저면 굉장히 높은 직급이다. 한국으로 치면 임원급)


"어? 왜? 짤렸어?"


"아니. 애 키워야 한대. 와이프가 배우였는데 그동안 애 키우느라 잠시 접고 있었나봐. 그래서 이젠 자기가 바톤터치해서 애랑 있을 거래."


"대박... 와이프가 엄청 유명한 배운가봐."


"그런 건 아닌듯. 그냥 배우 지망생 정도?"


"어? (3초 간 멘붕) 그런데 슈퍼 바이저까지 한 사람이 배우 지망생 와이프 밀어준다고 일을 그만둬? 휴직도 아니고?"


"생소하지. 나도 좀 그랬는데 사람들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하더라고. 그 부서 사람들은 십시일반 푼돈 모아서 주던데? 이제 저 사람 돈 못 버니까 비상금 좀 모아주자고. 그거 주고 맥주 마시다가 빠이빠이 하더라고."

 


Ep 3. "한 달 못 나와요. 아빠가 되서요."


이 에피소드는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된 거다. 남편이 일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 3명이 비슷한 시기에 아빠가 됐다. 그리고 세 분 모두 한 달 간 휴직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생소한 건 아빠의 휴직이 자연스러운 문화만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회사는 '시급제'다. 일한 만큼 돈을 받는다. 한 달을 쉰다는 건 상당히 큰 경제적 손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은 쉬었다. 아이를 돌볼 와이프도, 곁에서 도와줄 지인도 있었지만 갓 태어난 아이와 보낼 한 달을 선택한 거다. 철저히 가족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곳 문화의 영향일거라 생각했다. 



뉴질랜드 아이들은 혼자 놀이터에 오지 않는다.


한국의 1인당 출산율은 1.25명으로 224개 나라 중 219번째로 높다. 다시 말해 뒤에서 여섯 번째다. 뉴질랜드는 1명이 1.92명. 한국보다 53%가 높다. 굳이 숫자로 말할 필요도 없다. 전세계적으로 갓난 아기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있다지만, 아직 뉴질랜드 놀이터엔 혼자 놀러오는 어린이가 드물다. 



2012년까지의 뉴질랜드 1인당 출산율 통계



그렇다고 육아의 지상낙원은 아니다.


오해는 마시길. '뉴질랜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지상낙원이에요. 무조건 오세요!' 할 생각은 없다. 


한국에서 아이를 가지면 나라에서 바우처를 준다. (50만원 상당) 아이가 태어나면 세액공제도 받는다. (첫째 30만원, 둘째 50만원, 셋째 70만원) 지자체에 따라 출산장려금을 주는 곳도 있다. 아이가 만 5살이 되기까지 집에서 양육한다면 780만원을 준다. 어린이집은 전액 무료다. 


반면 뉴질랜드 정부는 좀 박하다. 어린이집 비용은 만 3살이 되기까지는 일절 지원이 없다. 주 5일 보낸다고 했을 때 한 달에 거의 100만원이 든다. 만 3살이 된다 해도 전액지원은 아니다. 아이는 만 5살 때 학교에 가게 되는데, 그것도 3시면 마친다. 맞벌이 가정이라 좀 더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또 수십 만원짜리 프로그램에 등록해야 한다. 12살이 되기 전까지 모든 병원비, 약값이 공짜긴 하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경제적 지원이 한국만 못하다. 맞벌이 가정의 육아가 상당히 비싼 나라다.  



문제는 지갑보다 문화가 아닐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는 둘째, 셋째를 고민하게 되는 나라다. 대체, 왜?

굳이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일과 가정이 조화를 이루게끔 배려하는 문화'가 아닐지.


사장님에게 일하다 애 데리러 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다. 애 돌보려 아빠가 퇴사하는 걸 누구도 구설에 올리지 않는다. 한 달 월급 안 받고라도 태어난 아이와 함께 하는 게 자연스러운 곳이다. 금요일 저녁 비어타임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직원들도 여럿이다. 


일하는 엄마에게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워킹맘들을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죄책감을 갖게 하는 주위의 시선'이다. 복직을 앞둔 엄마가 젖먹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다. 동네 할머니들, 친척들, 조리원 동기들까지 수근거린다. "저 어린 걸 ...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벌써 어린이집에 보내." 적어도 세 살까진 엄마가 끼고 있어야 한다며 알지도 못하는 집 아기를 가엾어하고 그 집 엄마를 탓한다. 일하고 싶거나, 일해야 했을 뿐인 엄마는 순식간에 죄인이 된다. 이래놓고 일과 가정의 조화가 가당키나 할까.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며 다른 아이의 부모들과 자주 마주친다. 그 중엔 젖먹이들도 적지 않다. 그 아이들을 선생님의 품에 건네는 엄마들은 하나같이 웃으며 아이와 '빠이빠이'했다. 


한국의 숱한 엄마들에게 필요한 건 바로 저 미소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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