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실패는 훌륭하다 #1
출국을 앞두고 인터넷 서점을 이잡듯 뒤졌다. 모니터 위에선 제목이 참 힘이 세다. 마스다 미리의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 그랬다.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으며 아무래도 싫은 몇 명을 떠올렸다.
A는 날 싫어했다. 하도 도끼눈을 해서 눈치없는 나도 알았다. 그래서 싫었다.
B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시쳇말로 날 부리려 들었다. 그래서 싫었다.
C는 내 아픈 데를 자꾸 긁었다. '사실이잖아'라면서. 그래서 싫었다.
길게 말했지만 사실 한 줄이다. 그들이 날 싫어해서, 나도 그들이 싫었다.
암튼. 책제목이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라니. 이렇게 택배 아저씨가 기다려지긴 또 오랜만이었다. 귀국짐을 풀며 제일 먼저 이 책부터 꺼냈다.
주인공은 지근거리에 있는 동료를 싫어한다. 겉과 속이 다르다거나. 내 속을 긁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거나. 자기 잘났다며 내 약점을 즈려밟는다던지. 요약하면 또 한 줄이다. 동료도 주인공을 좋아하지 않은 거다.
내 인생에서 '아무래도 싫은 사람'의 역사는 짧지 않다. 뭘 알았을까 싶은 어린시절에도 싫은 사람이 있었다. 괴로웠다. 날 싫어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나의 과오를 사과하기도 했고, 부러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기도 했다. 그에게 입에 붙지도 않는 칭찬 세례는 또 얼마나 날렸던지. 하지만 그건 패착이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 입에 붙지 않는 말 계속 될 리 있을까. 결국엔 욱-했다.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멱살을 잡아 올리고 싶은 마음과 하하호호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뒤섞일 수록 그들과의 관계에 집착했다.
생각해보면 한 달에 한 번 얼굴 볼까 말까 했던 사이를 어찌 해보려 하루에 한 시간씩은 괴로워 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난 사랑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정신과 전문의의 강연을 봤다. (서천석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누가 날 싫어하는 게 너무 괴로워요."
클릭했다. 그의 진단은 간결했다. '그냥 두세요.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이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상엔 2:7:1의 법칙이 있어요. 열 명 중에 2명은 날 싫어하고, 7명은 아예 관심없고, 1명이 날 좋아해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그 비율은 같아요. 반대로 그냥 난 내 맘대로 살거야, 하고 살아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니까 드리는 말이에요. 그냥 맘가는대로 사세요."
2:7:1.
가만히 그 숫자에 한 명 씩 대입시켜봤다. 가만보자. 날 싫어하는 사람 둘, 나한테 관심없는 얘, 얘, 얘 일곱, 날 좋아해주는 하나. 생경했다. 그간 '싫음'에만 레이더를 맞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7과 1, 특히 1에 대입된 사람들을 곱씹게 된다. 하긴.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날 좋아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뭐 해 준 것도 없는 인턴이 매년 스승의 날이면 장문의 편지를 보내온다.
맨날 들들 볶기만 했던 부사수가 내 이민에 눈물 바가지를 쏟았다.
시시껄렁한 농담에 '님 덕에 웃었어요'라며 안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딱히 뭘 한 것도 없는데 고맙게도 내 인생의 결과 맞았던 열에 하나,
딱히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인생결이 다른 열에 둘.
나만 못되고 못 나서 그런게 아니다. 마음이 편해졌다.
지난 달, 난 한국에 있었다. 선배 D는 내게 밥 먹자 여러 번 청했다. 그 때마다 사정이 있었다. 출국 며칠 전, 선배가 멀찌감치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 시간이 비었다. 당연히 선배가 차 한 잔 청할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쿠폰 도장 하나 남은 그 카페에서 샷 추가한 라떼'까지 정하며 몇 걸음을 걸었다. 그런데 왠걸. 그가 그냥 목례만 하고 지나갔다. 아차 싶었다.
사람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날 위해 주고 아껴주는 이들은 사소하게 여기게 된다. 엄마의 아침밥이 그랬고, 선배가 청하는 차 한 잔이 그랬다. 돌이켜보니 날 도왔던 부사수의 밤샘도 그랬다. 내가 어찌어찌 해야 할 건 바로 이들과의 관계구나.
내게 관심이 1도 없는 열에 일곱을 위해 삶을 치장하지 않고,
내가 어찌해도 날 싫어할 열에 둘에게 잘 보이려 오버하지 말자.
대신 이런 나라도 이뻐해주는 열에 하나에게 고마워하자.
늘 먼저 오는 D의 카톡은 당연하지 않다.
늘 내게 일을 나눠 달라 청했던 E의 배려를 디폴트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늘 내 스트레스를 걱정했던 F의 심상치않은 카톡 프로필을 그냥 지나쳐선 안된다.
다음에 한국에 가면 꼭 그 선배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