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실패는 훌륭하다 #2
그 즈음 다녀온 여행에서 찍어온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이었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백 개 가까이 달린 좋아요에 흐뭇해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일상적인 수다가 한창이던 단톡방에서 한 지인이 뜬금없이 핀잔을 줬다.
'너 페북 보니까 허세 쩔던데?'
같은 창에 있던 사람들이 ㅋ을 연발했다. 아무렇지 '않지' 않았으나 어색해지고 싶지 않았다. 나도 조용히 ㅋ을 몇 개 눌렀다. 그리고 사진을 내렸다. 주눅이 들었다.
누구나 SNS를 한다. 내가 아는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인 큰이모도 카스에 사진을 올리신다. 두번째로 나이 많은 지인인 둘째 이모가 바로 댓글을 다신다.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사람인 지드래곤도 인스타를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선비에 가까운 남편도 이따금 페북에 사진을 올린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인생의 낭비'라 말하는 글을 나는 참 많이 보았다. 보여주기 위한 삶은 허세이고 가식이라며 참 많이들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가 한 겹, 두 겹 쌓일 수록 '진짜 그런가부다' 여겨지더라. 페북에 사진을 올리지 않게 됐고, 페친들의 사진도 꼬여 보였다.
그러던 며칠 전, 난 유시민의 <표현의 기술>을 읽고 있었다. 맘에 드는 구절에 밑줄을 긋는 습관이 있다. 난 벌써 몇 분 째 145쪽의 몇 문장에 자꾸 줄을 그어대고 있었다. 요는 이거였다.
"생각과 감정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놓아야 합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정치를 해서 그런지 이렇게 묻는 분을 자주 만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왜 만날 싸우나요?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요." 정말 상투적인 질문입니다. "정치인들은 싸운다. 싸우는 건 나쁜 짓이다. 싸우는 모습은 보기 싫다." 이런 고정관념에 입각해서 정치인을 힐난하는 것이죠. 정치인들이 무엇을 무기로 싸우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어쩌다 몸싸움을 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말과 글로 싸우고 투표로 승부를 냅니다. (...) 민주주의는 여야가 싸우는 게 정상입니다. 안싸우면 문제 있는 겁니다. (...) 시장 바닥에 가면 할머니들이 그럽니다. "싸움 좀 그만해!"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아이고 어머니, 싸우라고 여야가 있는 건데요.'
유시민 <표현의 기술> 145쪽
세상에나. 맞다. 난 딱 그 상투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흠, 그렇다면 SNS가 인생낭비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허세'를 위한 변론꺼리를 찾을 수 있을까. 유시민 씨 말마따나 생각에 자유의 날개를 달고 나니 의외의 과거가 뇌리를 스쳤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
실연의 아픔을 달래려 휴학을 했다. 돈은 없었고, 대신 아빠가 항공사 마일리지 5만을 주신댔다. 유럽 왕복은 7만, 아시아 왕복은 3만이었다. 어중간했다. 가고 싶은 건 유럽, 특히 로마였지만 마일리지가 부족했고 중국은 어쩐지 너무 평범했다. 묘안이 떠올랐다. 아시아로 in해서 유럽에서 out하면 되잖아. 딱 5만이었다.
마침 <문명교류사>란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시안'이란 도시를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도시가 항공사의 취항지에 있었다. 그렇게 중국 시안 IN - 이탈리아 로마 OUT을 결정했다. 근데 좀 찾아보다 보니 그 두 도시는 그 유명한 <실크로드>의 끝과 끝이었다. 그때부터 이렇게 이야기했다. (실연 후 도피성 + 아빠 마일리지의 맥시멈이긴 하지만 어쨌든) 실크로드 여행을 간다고. 뭔가 '지적인 척' 하고 싶었던 것 같다.
2.
두 달짜리 여행이었다. 일기를 매일 2시간 쯤 썼다. 혼자 간 여행이라 밤엔 할 것도 별로 없었다. 여행이 끝났다. 아직 개강은 한참 남아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어 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돈들여 10권을 찍었다. 당시 블로그에도 올렸다. 여자 혼자 2달동안 실크로드 여행을 다녀오다니! 뭔가 '용감한 사람인척'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폰이 나오기 전이었다. 디지털 카메라 화질도 별로였고, 페북은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다. 있었다면, 아마 생중계를 하고 다녔을 거다.)
3.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걸 남겼다. 인터넷은 커녕 국제전화 찾기도 어려운 지역이었다.가이드북이 있을 리 없었다. 오만 자료 뒤져가며 나만의 가이드북을 만들어야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여행한 실크로드 7개 나라에 대해 제법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이 사막에서 어찌 문명이 번성할 수 있었는지, 종교가 이들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떠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날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맨땅이었다. 변수는 하루에 30개 쯤 등장했다. 버스를 잘못 타서 전혀 다른 도시에 내렸다던지. (7시간 짜리 이동이었다.) 현지 명절이라 나랏님도 표를 구할 수 없는 날에 우두커니 역에 서 있다던지. 길에서 잘 순 없었다. 철판을 수없이 깔았다.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전보다 조금 더 거침없어진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4.
2달 동안 써 온 일기를 <문명교류사> 수업 교수님께 한 권 드렸다. 그 책을 본 교수님이 대학원 추천서를 써주셨다.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사귀고 나서야 알았다. 그 남자가 내게 반했던 건 내 블로그 여행기 때문이었단 걸.
요약하면 네 줄이다.
1. '뭔가 지적인 척'하고 싶어 실크로드 여행을 갔다.
2. '뭔가 용감한 척' 하고 싶어 일기를 썼다.
3. 어쩌다 보니 조금 지적인, 다소 용감한 사람이 됐다.
4. 어쩌다 보니 그 허세가 지금 내 운명을 만들었다.
1. 허세 부리려면 내 욕망을 좀 알아야 하니까.
허세의 분야는 다양하다. 흔히는 여행, 패션, 음식, 미모, 지식, 인맥- 이 정도? 그 중 유독 끌리는 허세의 포인트가 분명 있었다. 내 핸드폰엔 유독 여행과 책에 대한 사진이 많다. 난 '자유로운 영혼인 척', '책 좀 읽는 여자인 척' 하고 싶은 거다. 그게 내 욕망이다. 사실 '내가 뭘 원하는지 아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하도 보고 듣는게 많은 시대라 더 그렇다. 허세를 부리려면 일단 내 욕망을 알아야 한다. 허세가 나의 힘인 첫번째 이유.
2. 허세 부리려면 뭐라도 해야 하니까.
허세를 떨려면 소스가 필요하다. 그 소스를 만들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 어디라도 나가야 하고 뭐라고 먹고 겪어야 한다. '자유로운 영혼인 척' 하려면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책 좀 읽는 여자인 척'하고 싶다면 책 한 권이라도 펴들어야 한다. 낯선 곳에서 하루를 묵고 낯선 한 줄을 읽는데서 삶은 풍요로워 진다고 믿는다. 내 여행과 책이 그러했듯 예기치 못한 내일을 만들수도 있다. 허세가 나의 힘인 두번째 이유.
3. 허세 부리다보면 진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지니까.
난 '따봉충'이란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인정과 관심, 사랑을 받고 싶은 건 본능이다. 내가 행복을 느낀 그 순간을 많은 이들이 좋아해주길 원한다. 거기다 벌레 충자라니. 난 LIKE는 힘이 세다고 믿는 사람이다. 숫자만큼 기분 좋아져서가 아니다. 그 숫자만큼, 그 박수와 응원만큼 '좀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난 그렇다.) 허세가 나의 힘인 세번째 이유.
안다. 허세는 독이 될 수도 있다. 페북에 올리려 명품 가방을 훔친다면 그건 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힘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깡통같은 허세를 떨 것인지 알토란같은 허세를 떨 것인지-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다. 남의 삶에 조언할 수 있는 깜냥이 되지 않으므로 그냥 난 나에게만 조언하련다.
YOON.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있어보이는 척' 하고 싶은 욕망에 마음껏 휘둘리며 살자. 그러다 보면 뭐라도 하겠지, 내가 뭘 원하는지 고민하겠지. 그러다보면 '있어보이는' 사람 말고 진짜 '있는' 사람 되고 싶어지겠지. 그니까 YOON. 페북에 글 올려도 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