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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경단녀를 위한 TED

모든 실패는 훌륭하다 #3

by Yoon

슬럼프가 오고 말았다.

난 월급 도둑이 됐다.


맡은 프로젝트가 연거푸 실패했다.


"괜찮아. 다음에 더 잘 할 수 있어!"


위로와 응원의 카톡조차 바늘같았다. 일이 적어 한가할 때면 '이젠 누구도 내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생각에 늪처럼 빠졌다. 손이 좀 바빠질 때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일을 좋아했던 나였건만, 모니터 앞에 앉을 때면 괴로웠다. 집중할 수 없었고, 아웃풋은 형편없었다. 점점 침체의 기간은 늘어나고 골은 깊어졌다.


월급날조차 반갑지 않았다. 혀 끌끌 차며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마음먹곤 했던 그 월급 도둑이 되어버렸다.



휴직, 퇴사. 포기의 방법은 많았다.


따져보니 포기의 방법과 핑계는 많았다. 가장 확실하게 지금의 고민을 끝낼 수 있는 솔루션은 퇴사였다. 그만둔다고 이야기하면 동료들은 어떤 반응일까. 일을 하지 않는 나의 삶은 어떨까. 컴퓨터 앞에서 보내던 그 시간을 이젠 뭘 하며 보낼까. 아이는 이제 어린이집에 보내지 말아야겠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어느 한 질문에서 멈췄다.


"나,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말로만 듣던 경단녀가 되겠구나. 33살, 한 아이의 엄마, 외국 거주자.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그리 좋은 스펙이 아니다.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고민이 버거워 드라마를 봤다.


고민이 생각보다 길어졌고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다. 이럴 때 훌쩍 여행이라도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신 소박한 일탈을 선택했다. 훤칠한 세자 마마 보검이는 아주 큰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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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미친 여자마냥 배시시 웃으며 3번을 돌려봤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보검이를 보고 나니 다른 드라마는 시시했다. 뭐라도 해야겠기에, 좀 생산적인 영상 시청을 해볼까 싶어 테드 TED를 켰다.




팔짱을 끼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별 기대는 없었다.


그냥 메인에 있는 아무 영상이나 눌렀다. 손 끝에 걸린 강연의 타이틀은 <Angela Lee Duckworth: Grit: The power of passion and perseverance>였다. 뜻은 알아야 겠기에 찾아보니 'Grit'는 '기개'란 뜻이다. 보나마나 기개있게 살라고 하겠지. 그 뻔한 말 누가 못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았다. '그래 너 어디 한 번 말해봐라' 정말 내용은 뻔했다. 이런이런 연구를 해봤더니 우수한 결과를 내는 건 '재능'이나 'IQ'랑은 상관없었다고 했다. 그들을 가른 건 '기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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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기개를 이렇게 설명했다.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꿈과 미래를 물고 늘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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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이다.


하지만 잔뜩 삐뚫어진 내 눈엔 와닿지 않았다. 그만볼까 말까를 14번쯤 고민했을 무렵, 그녀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아.

실패가 끝이 아니란 걸 알거든.


그녀는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진행된 한 연구라나. 연구는 '아이들은 좀 더 끈질기게 뭔가를 파고든다'라고 결론내렸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어릴 때 줄넘기 쌩쌩이 한 번 해보려 며칠 밤 동네를 시끄럽게 했다. 체르니 40번인가까지 쳤는데, 지금이었다면 하루만에 포기했을 것도 같다.


그녀는 아이들의 그런 끈기, 기개의 원인을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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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믿기 때문입니다.

한 번 실패해도, 그게 끝이 아니란 걸요."


몇 번을 돌려봤다. 아무 생각없이 틀었던 영상에서 저 한 문장을 만났다.



어른들은 실패가 두렵다.

나도 두렵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우리는 숱하게 좌절하며 산다. 입시에 치이고 취직에 치이고 창업에 치인다. 흰 머리가 하나씩 늘고 나이 앞자리가 달라지며 우린 그 실패가 점점 두렵다. '다시 또 시작할 수 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고개를 마구 젓는다. 보고 싶지 않지만 결국 클릭하게 됐던 수많은 젊음의 자살과 실패 뉴스를 보며 내 나이의 실패와 포기는 영원한 OUT이라 여겼다. 다시 직장으로 복귀하지 못한 이른바 '경단녀'들의 한숨은 더욱 와닿았다.


연거퍼 실패하는 프로젝트가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느껴진 건 그래서였다. 이 실패가 내 마지막 기회를 앗아갈 것 같은 불안. 날 괴롭힌 건 바로 그 불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삶을 배운다. 나는 내 아이에게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는 엄마'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배운 아이가 움츠려든 삶을 살까 두렵다. 언젠가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라며 등돌리는 것도 두렵다.


다시 시작하지 못할 거란 불안보다 몇 곱절 큰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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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넘어지더라도, 남들보다 빨리 달리지 못해도 괜찮다. 처음 생각한 트랙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 달릴 수도 있다. 이 일을 하든, 새로운 일에 도전하든 난 내 마라톤을 끝까지 뛰는 엄마가 되어보이고 싶다. 좀 넘어졌다고 종료 휘슬이 울리진 않는다. 난 지금 조금 오래 넘어져 있는 거다. 무릎의 상처일랑 훈장으로 여길 날이 올 거다.



아이가 있다는 게 일하는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서는 불리한 점이라 여겼었다. 아이를 챙겨야 하고, 지근거리에 있어줘야 하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애엄마'란 타이틀은 일하고 싶은 여성의 발목을 잡는 '늪'만이 아니다. 더 기개있게, 더 즐겁게 인생이란 마라톤을 뛰어야 할 '이유',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내 딸에게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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