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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Aug 23. 2016

우리의 뚱뚱함에 대하여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43

늘 다이어트를 했다.


난 대한민국 보통 여자다. 살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단 이야기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 당시 우리 반은 사십 몇 명이었다. 개학 첫 날. 뻘쭘하게 교실에 들어서며 눈대중으로 수를 셌다.


'나 이 교실에서 몇 번 째로 뚱뚱하지?'


3번째였다.


걸어서 5분 거리인 집까지 마을버스를 탔다. 거리 위에서 아는 사람들과 마주칠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일년에 한 번 있는 신체검사를 앞두곤 미칠 것 같았다. 수능도 그보다 두렵진 않았다. 몸무게는 점점 늘어갔다. 고3때 칠십 몇 키로를 찍고 그 후로 한동안 체중계 근처에 가지 않았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다이어트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의원에서 약을 지었다. 침도 맞았다. (양손바닥에 침을 100개 쯤 꽂고 집에 돌아와 힘없이 누워 잤다.) 며칠 굶어도 봤다. 헬스를 다녔다. 매일 밤 줄넘기를 들고 나갔다. 덴마크 다이어트, 황제 다이어트는 기본이었다. 단식원도 가봤다.


대개 살은 조금 빠지고 많이 쪘다. 다시 다이어트를 했다. 이 사이클이 15년을 돌았다. 가장 큰 터닝포인트였던 '결혼 준비'를 변곡점으로 지금은 제법 날씬하다.



살을 빼고나니

살이 참 우스워 보였다.


날마다 옷을 샀다. 사이즈가 작아질 수록 더 샀다. 자꾸 나가고 싶었다. 오랜만에 보는 이들의 놀란 토끼눈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 마주칠까 무서워 한 정거장 거리도 마을버스를 탔던 그 길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흥겹게 걸었다.

 

살집 있는 친구에게 건방지게 조언했다. 체구가 큰 행인을 향한 누군가의 비아냥거림이 마뜩찮으면서도 내가 그 대상이 아님에 안심했다. TV에 나와 살에 대한 고민을 말하는 이들을 보며 '그럼 좀 빼지' 답답해했다. 적어놓고 보니 새삼 얼굴이 붉어진다.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덮어놓고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나게 거리를 쏘다니고 돌아와 TV를 트는 순간 기가 죽었다. TV를 끄고 스마트폰을 켠대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훨씬 날씬하고 예쁜 (게다가 어린) 이들이 즐비했다.


어찌 저리 허리가 잘록해? 갈비뼈라도 뺐나. (좋겠다)

다리 알 빼는 주사가 있다더니, 그거 했나? (좋겠다)

세상에 어떻게 저 옷이 헐렁할 수가 있지? (좋겠다)


익숙한 느낌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보다 날씬한 애들의 숫자를 헤아리던 그 순간의 불안과 비슷했다.


한창 예민할 땐 아침 체중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달라졌다. 다만 300g이라도 는 날은 종일 우울하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도 마냥 즐겁지 않았다. 베이컨을 잔뜩 올린 까르보나라 접시를 향해 포크를 돌진하다가도 멈칫했다. 그 좋아하는 크레이프 케잌을 반 이상 먹을 수 없었다. 먹는 행복보다 먹는 불안이 더 커졌다.


문제가 뭘까. 어린 시절 삶이 불행했던 이유가 '살'이라고 생각했다. 노력했고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불쑥- 불행의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날씬해졌는데도.



그 즈음, 김지양이란 사람이 보였다.


그녀는 플러스 모델이다. 한국인들의 시선으로 보면 큰 몸집이다. 그녀는 일명 '플러스 모델'로 활동하고 있고, 마르지 않은 이들 (‘여성복 사이즈 66 이상, 남성복 사이즈 100 이상’)을 위한 잡지 <66100>을 만든다.


처음엔 자꾸 색안경이 껴졌다.


'저거 자기 합리화 아냐? 살이 안 빠지니까 그냥 괜찮은 척 하는거.'


속으로 빈정대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그녀의 이야기가, 표정이 궁금했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기사를 읽었고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잉했다. 합리화라고 치기엔 너무 꾸준하고 자연스러운 그녀의 당당함과 에너지가 좋아졌다.


그녀의 주장은 명료했다.

“사이즈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아름답다”
 

그녀는 '그냥' 자기 몸을 자신있어 했다.


@김지양 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lusmo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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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쌍하게 나온 사진을 골라 더 얄쌍하게 만들고 나서야 올리는 게 인스타라고 생각했거늘.


@홈페이지 http://www.plusmodel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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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정한 어깨, 푹 수그린 고개를 했던 그 시절의 내게 이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다. 저렇게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난 마을버스를 타지 않아도 됐을텐데.


@홈페이지 http://www.plusmodel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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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앞에 매혹당한 저 게슴츠레함이라니. 반 넘게 남겼던 크레이프 케잌이 생각났다.



내 딸이 살로 고민한다면

난 무어라 해줄 수 있을까.


늘 그러하듯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 내 딸에게 이어진다. 내 딸은 내 체질을 닮았다. 어디서든 언제든 살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거다. (한국처럼 심하진 않지만 뉴질랜드 여성들도 날씬한 몸에 대한 강박관념이 아예 없진 않다.)


어느 날 페이스북에 '완전 돼지!'라고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며 아이가 운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http://www.hankookilbo.com/v/a7d218686117474e876532c17222fb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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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양 씨의 답변이 궁금하다면 링크 클릭



별안간 엄마가 떠올랐다. 


잠꾸러기 우리 엄마는 내가 출근할 때 대부분 꿈나라 탐험 중이셨지만, 간혹 일찍 눈 뜨신 날이면 출근하는 딸을 배웅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쓰셨다. 씬의 전개는 한결같았다.


#1. 신발을 신고 있는 딸을 향해 주책맞게 촉새 걸음

#2. 궤적이 커다란 물개 박수

#3. (다소 오바스럽게 대사) "아이고 내새끼. 어찌 이렇게 이뻐!"

#4. (딸, 싱겁다는 듯 웃으며 대사) '뭐야~'

#5. 돌아서 문을 여는 딸의 입가에 미소

#6. 딸, 엘리베이터 거울보며 혼자 실없이 ㅋㅋ


어느 날은 물어봤다.


"엄마. 나 옛날에 살 많이 쪄서 막 코끼리 다리만했을 때는 어땠어? 그때보단 지금이 더 이쁘지 않아?"


"그 때 코끼리 다리긴 했지 ㅋㅋㅋ 뭐 그때도 이쁘고 지금도 이쁘고."


엄마의 오바는 한결같았고, 그 오바는 힘이 셌다.


살 가리려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고 다니던 그 시절에도 집에서만큼은 반바지를 입었다. 한 번도 살 빼라 독촉하지 않으셨다. 대신 불쑥 적어 내민 다이어트 식단을 한여름 뜨거운 부엌에서 참 열심히 만들어주셨다. 우리 엄마에게 나는 그냥 아무래도 이쁜 딸이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은 '내가 이토록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무의식 속의 자신감이라 했던가. 코끼리 다리든 학다리든 부모의 사랑엔 변함없다. 유명한 책 제목처럼 '내가 어떤 삶을 살든 응원'해줄 존재가 주는 안도감이다.


엄마의 오바스런 물개 박수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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