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 May 29. 2017

오마니의 명란젓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52

나는 잔뜩 심술이 나 있었다. 


같이 대합실을 채우고 있던 수십 명은 이미 기다리던 짝을 만나 집으로 돌아간 지 오래. 비행기가 내린 지 두 시간이 다 되어가건만 어머님은 나오실 기미가 없었다. 아이와 함께 "할머니 나와라 디비디 바비디 부!" 하는 것도 한 두번이지. 시간이 갈수록 우린 말이 없어졌다. 끼니 때가 다 되어가는 통에 배도 고팠다. 문제는 분명했다.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오셨을 음식 중 뭔가가 검사에서 걸린 거다.


이곳에 나와 살기 시작한 지 4년. 어머니는 4번째 비행기를 타셨다. 이미 앞선 3번의 비행도 그놈의 음식물 때문에 매번 말썽이었던 터. 이번엔 제발 그냥 오십사 말씀드렸건만 어머니는 답이 없으셨더랬다. 배가 고팠다. 아이는 점점 피곤해했다. 금방 돌아와 준비할 요량으로 실온에 내놓은 식자재들도 신경쓰였다. 난 꼬일대로 꼬였다. 꼬인 마음은 꼬인 말로 튀어나왔다.


"오빠. 다음부턴 음식물 절대 가져오시지 말라 해. 이게 뭐야. 우리만 남았잖아."


남편은 말이 없었다. 내 입이 댓발이나 나온 걸 보곤 조용히 한 마디 던진다.


"무사히 오시는 것만도 어디야."


맞는 말을 해서 더 화가 났다. 내 못난 마음을 들춘 남편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스스로 참 못됐다 생각하면서도 날선 말을 자꾸 뱉어냈다. 어머니의 비행기가 내린지 2시간을 넘겼다. 남편은 지루해하는 아이에게 '저 벽' 너머 할머니가 오고 계시다고 이야기했다. 아이가 대합실에서 더 이상 놀거리를 찾지 못할 즈음, 어머니가 나오셨다. 무척 지친 모습이셨다. 


"어머니!!!"


나와 눈이 마주친 어머니의 표정이 울상이다. 말도 안 통하는 수화물 검사에서 난처한 두 시간을 보내신 탓일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와의 재회를 만끽할 겨를도 없이 내게 속상함을 토로하신다. 


"어쩌냐. 명란젓을 뺐겼어. 꽁꽁 얼렸다 꺼내서 오늘 저녁에 김 올려서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았는데 그것만 뺐겼어."


아. 

코 끝이 찡해진 건 한 순간이었다. 눈엔 눈치없이 눈물이 고였고, 입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아무말 대잔치를 해댔다. 범인은 명란젓이었다. 며느리가 좋아하는 명란젓, 먹고 싶다 노래를 불렀던 명란젓. 


명란젓은 외국에서 살림하는 내게 늘 그림의 떡이었다. 한인마트에선 제대로 된 걸 팔지 않았다. 어쩌다 한국에 갈 때면 차려주신 명란젓 그릇을 비우느라 바빴다. 어머니는 내게 명란젓을 먹이고 싶으셨던 거다. 손짓 발짓으로 고군분투해야 했던 2시간의 노곤함이 아니라, 김 올려 베어물 며느리의 명란젓 한입이 안타까워 저리 발을 동동 구르신다. 간장 종지보다 작고 좁았던 내 마음이 부끄러웠다. 내 동요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남편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집에 와 푼 어머니의 캐리어는 헤르미온느의 마법 가방 같았다. 먹거리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진미채부터 김치, 새우젓. 하얀 것에서 빨간 것까지 부엌 바닥이 가득 찼다. 마지막으로 빨갛고 커다란 통 하나를 꺼내며 어머니는 신나하신다. 


"여깄다. 딸기쨈. 엄마가 만들었지만 기가 막혀."


짐정리를 거드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부끄러움이 딸기잼이란 세 글자에 다시 고개를 든다. 며느리가 좋아하는 딸기잼이다. 너무 맛있어서 가게에서 파는 건 못 먹겠다고 엄살을 피웠던 그 딸기잼. 고작 2시간 기다리는 걸 버거워했던 며느리가 이걸 먹을 자격이 있을까. 


짐을 다 꺼내고서야 마음에 여유가 도신 모양이다. '우리 손녀', '우리 아들' 한 번씩 안아주신다. '우리 며느리~'하며 뒤돌아선 날 안아주신다. 마음이 떳떳하지 못해 뒤돌아서 안아드리지 못했다. 그 날은 유독 밤이 길었다. 결혼한 지 5년. 어머니 앞에서 부끄러웠던 순간순간이 다시 주마등처럼 스친다. 


결혼한 이듬해, 아버님께서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도련님의 전화를 받은 그 일요일 밤의 고통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두운 방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말없이 울었다. 새벽 비행기 안이 그렇게 어두운 줄 그 전엔 몰랐다. 도저히 잠들 수 없었던 그 시간을 지나 우린 빈소에 닿았다. 어머니는 내 손부터 잡으셨다. 


"어쩌니. 널 좀 더 이뻐해주고 가셨어야 했는데..."


그 사랑을 내가 어찌 알 수 있을까. 그 날 빈소 입구에서 눈물로 가슴에 새긴 그 사랑을 난 또 잊고 있었다. 아버님 영정 앞에서 평생 어머니의 친구가 되어드리겠노라 했던 그 약속도. 



......

부끄러운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왔다. 어머니의 딸기잼을 열어 버터에 노릇노릇 구운 식빵에 맛깔스럽게 발랐다.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의 딸기잼 그 맛 그대로다. 가게에서 파는 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되직했고, 듬직했다. 철없는 며느리가 하이톤으로 시어머니의 아침을 깨운다. 


"오마니! 딸기잼 대박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가 있어 울 수 있었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