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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ul 15. 2017

아이들의 마쯔리

짧게 일본 여행을 온 참이다. 가족과 함께 하는 패키지 여행인지라 뭐든 대충이었다. 옷도 대충 쌌고 루트도 대충 봤다. 일기예보도 대충 훝고 대충 떠난 여행에서 드문 행운을 만났다. '마쯔리'였다.



본디 종교적 의미가 짙다고 하나 이방인의 눈엔 흥겨운 축제에 가까웠다. 같은 전통복장을 차려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커다란 북을 옮기며 행진했다.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북을 쳤고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마을에서도 왔고 회사에서도 왔다 했다. 


내게 아이가 있어서일까, 아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밟혔다.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는 부모의 품에 안겨 행진했다. 더위에 지치면 그 품에서 그냥 잠들었다. 이런 걸 두고 시선강탈이라 하는 것이겠지.



그보다 조금 더 큰 아이들은 행진을 이끌었다. 가장 첫 열, 고사리만한 손으로 무리를 잇는 봉을 꽉 쥔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분홍빛으로 물든 볼이 복숭아보다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지치면 잠시 봉을 놓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뜨거운 대기를 꽉 채워 울리는 북소리엔 아랑곳하지 않고 잠든 아이도 있었다. 





처음엔 아이들이 사랑스러웠다. 조금 더 지나자 어른 못지 않게 진지한 아이들의 씩씩함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이내 느껴진 감정은 '부러움'. 맞잡은 봉이, 북채를 단단히 쥔 주먹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 이렇게 한 몫 하고 있어!'


아마도 아들러 때문일 거다. 얼마 전 그의 책을 읽었고, 한 문장이 깊이 남았다.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공헌한다고 느낄 때 

스스로를 가치있다 여긴다. 그리고 그제서야

세상을 향해 용기를 낼 수 있다."


'타인의 인정'과는 다르다. 딱히 누군가 치켜세워주지 않더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우리 무리에 공헌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인정'에 아들러는 집중했다. 정말 그랬다. 살며 마음이 꽉 찼던 몇몇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공헌하고 있었다. 나로 인해 후배가 한뼘 성장했을 때, 내가 낳은 딸로 인해 가족들의 저녁 식탁이 따뜻해졌을 때, 지친 친구의 등을 토닥여주었을 때. 


마쯔리의 맨 앞 줄에 선 아이들을 보며 그 순간의 느낌을 떠올렸다. 보살핌을 받는 '아이'가 아니라 무리에서 제 몫을 하고 공헌하는 '사람'의 순간이 저마다의 무의식에 깔리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수십 년이 흘러 흰 머리 지긋한 노인이 되었을 때도 저 무리에 끼여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지 않을까.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모두의 마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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