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 Aug 11. 2017

시어머니의 왕초보 잉글리시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58

시어머니가 영어 공부를 시작하셨다. 


시작은 동유럽 여행길이었다. 말로만 듣던 소매치기를 당하셨다. 여권을 잃어버렸고, 가이드는 어머니를 남겨둔 채 일행을 이끌고 이동했다. 그 연배 어른들이 그러하듯 어머니의 영어란 헬로우와 굿모닝이 전부였다. 혈혈단신, 손짓 발짓 눈짓만으로 여권을 재발급받아야 했다. 그 여행을 마치고 어머니는 결연하게 한 마디 하셨다. 


"영어를 배워야겠어."


어머니, 좀 쉬시면서 하셔요. 


그 때부터 어머니는 고3처럼 공부하신다. 아침을 드시곤 화장실에 다녀와 커피 한 잔 내려 자리에 앉으신다. 어머니의 선생님은 <EBS 왕초보 잉글리시>다. 점심 무렵, 시간이 벌써 이리 되었냐며 서둘러 일어나신다. 밥 한 공기를 비우면 다시 공부가 시작된다. 저녁이라고 다를까. 자정에 가까울 무렵- 시간이 벌써 이리 되었냐며 아이패드를 덮고 들어가신다. 어머니의 왕초보 잉글리시 라이프는 벌써 3달째에 접어들었다. 




웬걸, 스마트폰으로 시간 때우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어머니의 왕초보 잉글리시는 힘이 셌다. 스마트폰 튕기며 소일하던 내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수십, 수백번 같은 문장을 되뇌시는 어머니는 나를 자극했다. 조용히 책장에 가서 책을 빼들었다. 



아들, 왜 프레젠트가 '지금'이야? '선물' 아냐?


어머니의 왕초보 잉글리시로 웃을 일도 많아졌다. 공부를 시작하며 어머니는 질문도, 말씀도 많아지셨다. 이를테면 이런 것. 


"아들, 프레젠트는 선물 아냐? 근데 여기선 '현재'라고 그러네? 왜?"


퇴근하고 와서 옷도 갈아입기 전인 아들에게 물으셨다. 


"아들, '퇴근 후'가 영어로 뭔지 알아?"


하루에 10시간 씩 영어 쓰는 아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묻는다.


"모르겠네. 뭔데요?"

"아프터 월~크"

"아하~"


손녀에게도 귀여운 불똥이 튄다. 


"원아. 할머니랑 영어 단어 퀴즈할까?"

"원아. 아까 그 선생님 이름 좀 발음해봐. 파렌?"


지금 당장 뛰어나지 않아도 배움을 즐기시는 분. 남편은 그런 어머니를 닮았다. 그래서 못하는 일을 잘하는 일로 만든다. 신혼 초, 일어나자마자 조용히 서재에서 한시간씩 영어를 공부하던 남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좋은 엄마가 될 필요는 없다.


엄마가 된 후로 아이에게 참 많은 걸 바라왔다. 활달한 아이로 컸으면, 편식하지 않았으면, 약속을 잘 지켰으면. 그 바람 중 상당수는 사실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 나는 내성적이었고 편식을 했으며, 자주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겼다. '너는 그리 살지 말어'란 마음으로 유독 아이를 채근했던 것도 같다.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속상했다. '내일은 홀리랑 잘 놀아봐-', '오늘은 브로콜리 좀 먹어보지?', '약속 안 지켰으니까 사탕 뺐을거야.' 아이가 따라주지 않으면 속상했다. 아이가 배우는 건 엄마의 '말'이 아니라 '삶'인데, 바보같이 그랬다. 


내가 바라는 삶을 살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삶을 아이가 배울테니까. 


사람을 좋아하자. 

배움을 즐기자.

지레 겁먹고 멈춰 있진 말자. 


아이가 살았으면 하는 그 모습대로,

내가 그리 살자.






매거진의 이전글 개인주의 엄마의 여자아이 육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