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재우러 들어갔다.
졸려하는 딸의 통통한 팔뚝에
볼을 부비며 투정을 좀 했다.
“오늘 엄마가 좀 속상했어.”
“왜에? (졸림졸림 건성건성)”
“엄만 일을 잘하고 싶은데,
점점 잘 못 하게 되는 것 같아.”
“그래? 엄마 속상했겠다.”
반쯤 돌아누워 그 작은 손으로
내 등을 토닥 거린다.
“근데 엄마, 모든 걸 다 잘할 순 없어.”
“응?”
“그래도 잘하고 싶은 건
계속 하다보면 잘할 수 있을거야.”
“응??”
“워니가 도와줄게. 천천히 한 번 해보자.
근데 엄마.”
“응???”
“자고 나서 도와주는 건 어때?
워니 너무 졸......”
엄마를 이렇게 놀라게 해놓고
순식간에 잠들어버린다.
‘그런 이쁜 말을 어디서 배웠을까.’
사실,
그 말은 내가 딸에게 해준 말들이었다.
인형옷도 잘 입히고 싶고
자전거도 잘 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 발 동동 구르는 딸에게
“모든 걸 다 잘할 순 없어. 잘 못 해도 괜찮아.”
라고 말했었다.
자전거 페달에 올려진 두 발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딸에겐
“그래도 하다보면 잘할 수 있을거야.
엄마도 자전거 배울 때 처음엔 앞으로 못 갔어.”
라고 이야기했다.
같이 해보자고,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했던 걸
아이는 기억하고 이야기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말보다 내 딸이 더 유심히 지켜보고,
기억하고 있을 것은 엄마의 ‘삶’이다.
내가 고난 앞에 일어서는지,
불행 앞에 울고만 있는지,
실패 앞이 그냥 도망치고 마는지.
내 말을 따라하듯
내 삶을 따라 살 거란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이가 언젠가 힘든 시간을 지날 때
마냥 울고만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로 그 때,
내 딸이 지어주길 원하는 표정을 지금 내가 짓자.
내 딸이 되뇌이길 원하는 주문을 지금 내가 외자.
엄마는,
잘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