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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Feb 27. 2019

당신의 식탁에 식은 죽은 없다오

모든 끼니는 훌륭하다 03. 잔치국수

"지금 주부 몇 년 찬데 

아직도 인터넷 레시피를 보니?"


오랜만에 집안 어른이 집을 찾아오신 날이었다. 

직장인의 꿀 of 꿀,

토요일 낮잠마저 반납한 손님맞이였다.

찌개에 넣을 애호박을 썰고 있을 즈음,

예상보다 일찍 벨이 울렸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늘어놓은 재료 사이를 바삐 오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손님 중 한 분이

대뜸 한 말씀 던지셨다.


"얜 지금 주부 몇 년 찬데 

아직도 인터넷 레시피를 보니?"


애호박을 썰려 들었던 손이 순간 멈췄다. 

맛난 것을 대접하겠다는 의지가 

인덕션 스위치를 끈 것마냥 한순간에 꺼졌다.


주부?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를 '주부'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난 일을 했다.

내 집에 살며 내 살림을 내가 꾸리고 있지만

내게 '주부'란 호칭이 붙여지는 건 불편했다.


일을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집안일은 여자인 니 몫이야, 란 생각이 

그 두 글자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느껴졌다. 

그 누구도 

내 남편에게 '주부'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한 해에 1,000끼

부엌은 지난한 노동현장


부엌일은 참 지난하다.

'먹는 것'은 30분이면 족하지만 

이를 위해 메뉴를 결정하고 장을 본 후

보관하고 손질한 후 조리하여 상에 차린다. 

치우고 정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부엌일이 고된 진짜 이유는 

그 '빈도'에 있다. 


말그대로 삼시세끼다.

1주일에 21끼, 일년이면 1000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쉴새없이 차리고 치운다.

어지간해선 어떤 집도 

빨래나 청소를 하루에 3번하지 않는다. 

손에 물 마를 날 없단 건

지극히 사실적 표현이다. 



'간단하게 국수나 해먹을까?'

뒷목이 뻐근해졌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집엔 금기어가 하나 생겼다.


여느 신혼부부처럼

남편에게 맛난 걸 해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시기였다. 


어느 날 '오늘은 뭐 해먹지?' 고민하는 내게

남편이 한마디 툭 던졌더랬다. 


"간단하게 국수?"



간단히?

그의 말이 귀에 확, 긁혔다.

내가 '주부'라 불려진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국수는 간단하지 않다. 

삶으면 땡, 이 아니다. 




야채를 사고 씻고 채썰고 소금 뿌려 물기 빼고 

기름 둘러 볶고 

마늘 소금 참기름 깨로 맛을 낸다.

볶아진 녀석들을 그릇에 덜어내고

달궈진 팬을 닦아내면

네, 다음 채소가 입장한다.

그걸 5,6번 반복한다. 



아, 육수 내는 건 별도다. 



국수든 무엇이든

'간단히 먹을까?'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부엌에서 동동거려본 적이 없어서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도 그랬다. 

내 살림을 갖기 전,

숱하게 그렇게 말했었다. 


"저녁에 간단히 닭도리탕 콜?"

"날도 추운데 뭐 뜨끈한 거 간단하게 먹을까?"

"굴밥 땡기네. 그거 간단하지 않아?"


엄마에게. 



간단한 것도, 당연한 것도 없다.

그저 우리 모둔 엄마의 사랑에 빚진거다. 


엄마는 뭐든 쉽다고 했다. 

닭도리탕이든 굴밥이든 뭐든 

식은죽 먹기라고 했다. 

딸이 똥배를 문지르며 읊어대는 그 메뉴들은

엄마의 부엌에서 척척, 슥슥, 슉슉 만들어졌다. 


TV보며 졸다가 핸드폰 좀 쳐다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밥먹자"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정말 간단한 줄 알았다.


결혼하고 내 부엌을 꾸리며 알았다. 

엄마가 '식은 죽 먹기'라고 말한 건, 

실은 이런 뜻이었다.


니가 맛나게 먹는 걸 보고싶어

그거에 비하면 수고쯤은 별거 아냐

기꺼이 해줄게, 우리 딸. 



오늘부터 우리의 식탁에

식은 죽은 없습니다.


내가 '주부' 소리에, 

'간단히' 국수 한 그릇 먹잔 소리에

마음을 다친 이유는 하나다.


내 식구 먹일 것 만드는 게 억울해서가 아니다.

오래 걸리고 번거로워서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열심히 만든 음식을 먹고

건강하다면, 행복하다면

그게 얼마나 고되든

내 행복이란 걸 안다. 


다만,

그 수고가 당연히 여겨지지 않길 바란다. 

내가 사랑을 담아 음식을 만들었다면

내 아이들은 사랑을 담아 

감사할 줄 알길 바란다.


"고마워요!"

"맛있어요!"

"힘들었겠다!"


이 셋 중 하나가

오늘 저녁 

우리의 식탁에 가장 먼저 올려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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