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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Mar 05. 2019

엄마도 아이스크림 소녀였어

모든 끼니는 훌륭하다 05. 투게더 아이스크림

아빠는 바쁜 아빠였다.


내 남편은 고마운 삼식이다.

회사가 가까워서 세 끼를 집에서 먹는다.

차리고 치우는 일이 번거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번거로움을 단박에 상쇄하고도 남는 건

5살 먹은 딸이 아빠와 떠는 수다다.


끊임없이 아빠에게

번개맨 이야기를 해달라 조른다.

끊임없이 아빠에게

오늘 단짝 레이카와 다툰 이야기를 한다.

끊임없이 아빠에게

자기가 싫어하는 반찬을 토로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종종 나의 아빠를 떠올린다.


그 시절의 아빠들은 바빴다.

별 보며 출근했고 별 보며 퇴근했다.

그래서일까.

내 어린 시절의 아빠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 시절의 기억 속엔

두 살 터울의 오빠,

오빠만 어여뻐 했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에게 순종했던

엄마만 등장하곤 했다.


 

5살 짜리 딸이 슬프다.

아가 때가 기억나지 않아서.


며칠 전, 이른 저녁이었다.

딸은 어제 구워놓은

깨찰빵을 잘근잘끈 씹으며

아빠가 안고 있는

4개월짜리 동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빠. 왜 아이들은

어렸을 때 기억을 다 잊어버려?"


"응?"


"난 사실 내가 아기였을 때가

잘 기억이 안 나."


"그랬구나. 원래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열심히 먹고 하다 보면 너무 바빠서

기억을 잘 못하게 되나봐.

아빠도 어렸을 때 기억이 잘 안 나."


"아빠."


"응?"


“나는 아가 때 잘 기억 못해도...”


아이는 사뭇 진지했다.


"그래도 엄마 아빠는

기억해줄거지?"



나, 아빠를 오해했던걸까.


예상치 못한 대화의 전개에

나도 남편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때 마침 걸려온 영상통화. 엄마다.


"엄마. 글쎄, 방금 밥 먹는데...”


아이의 말을 전해들은 엄마는

벅차하는 내 표정이 더 재밌으신지

한참을 웃으신다.


"그러게 말이다.

근데 너도 사춘기 때 막 울면서 그랬어.

어렸을 때 사랑받지 못한 것 같다고.

엄마야 무뚝뚝해서 그렇다 쳐도

니 아빠는 엄청 억울하셨을거야.

딸래미 얼마나 이뻐하셨는데. 말도 못해 그건."


혹독했던 사춘기 시절이 소환됐다.


모두의 그 시기가 그렇듯

꽤 외롭고 밉고 막막하고 괴로웠다.

사람은 불행할 때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한다.

대개 그 대상은 가족이고, 부모다.

내가 그랬다.

왜 오빠만 이뻐하냐고, 나는 방임하냐고

울면서 바락바락 소리 질렀던

그 때의 나를 참 오랜만에 떠올렸다.

 


투게더와 엑설런드, 쌍쌍바

냉동실 문칸 둘째줄 담당은 아빠였다.


그렇게 날카롭던 시절에도 삶의 낙은 있었다.

냉동실 문칸 둘째줄에 그득했던 아이스크림.

투게더와 엑설런트, 쌍쌍바같은

그 시절의 아이스크림들.


어쩌다 아이스크림이 없을 때면

부리나케 엄마에게 달려가곤 했는데

단 것 질색하시던 엄만

좀처럼 장바구니를 드는 일이 없으셨더랬다.


그러고 보면

냉동실 문칸 둘째줄은 늘 아빠 담당이었다.


늦은 밤 퇴근길엔 어김없이

검은 봉다리와 함께셨다.

주말에 장보러 가면

내가 집어온 아이스크림을

엄마 몰래 다른 찬거리 밑에

숨겨준 것도 아빠였다.


플라스틱 숟가락 하나씩 들곤

한 숟가락이라도 더 퍼먹으려

기를 쓰던 그 시절의 왁자지껄한 공기.


아주 오래된 추억들을 곱씹으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5살 짜리 딸의 말마따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은 것은 나였다.



우리 딸, 그 많은 아이스크림을

누구와 먹었을까.

 

딸은 한국을 너무나 그리워한다.

지난 여름 한국에 다녀온 후

부쩍 한국 타령이 심해졌다.


어린이집 마치고

"어디 가고 싶어?"라 물으면

"한국!"이라 답하는 아이.


"왜 그렇게 한국이 좋아?"

"배스카페가 있거든!"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좀 더 말을 들어보니

배스카페는 '배스킨라빈스'였다.


"배스킨라빈스? 그게 그렇게 좋디?"

"응! 어린이집 끝나고 맨날맨날 갔어."

"맨날맨날??? 정말?"

"응! 할아버지랑!"


출근한 딸을 대신해

아빠는 지난 여름 내내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픽업해주셨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지만

투정도 없이 잘 버텨준 딸이

대견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비결을 이제서야 알았다.


30년 전 검은 봉다리에 담아오셨던

투게더 아이스크림마냥

지난 여름, 내 딸은

31가지 아이스크림의 향연을 맛보았구나.


......


내 딸처럼 나도

우리 아빠의 아이스크림 소녀였단걸

갑자기 깨달아버렸다.



"너희와 많이 못 놀아줬어."

왜 난 그 사과를 덜컥 받아버렸을까.


내가 결혼할 무렵 퇴직하신 아빠는

어느 날 술 한 잔 걸치시며 고백하듯 그러셨다.


"어렸을 때 너희들이랑 많이 못 놀아줬어.

일 하느라. 그땐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

미안하다 우리 딸."


그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멋대로 오해한 사춘기의 기억 탓에

속으로 가만히 그 사과를 받아버렸다.


후회한다.


돌아오는 여름엔

아빠와 배스킨라빈스에 마주앉아

투게더 이야기를 꺼내야지.

그리고 꼭 이렇게 이야기할테다.


"미안하긴. 별말씀을 다 하시네.

아빤 아빠 방식대로

우리랑 놀아준건데뭐.

아빠가 뼈 빠지게 일한 덕에

투게더도 원없이 먹었지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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