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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Mar 07. 2019

고구마같은 인생도 괜찮아

모든 끼니는 훌륭하다 06. 호두와 고구마

에어프라이어 덕에

고구마를 원없이 먹는다


에어프라이어를 산 후

부엌의 풍경이 달라졌다.

삼겹살, 치킨, 계란, 누룽지.

못하는 게 없다. 

남편은 신발도 한 번 넣어보라 했다.

그 중 백미는 단연 고구마.

주먹보다 살짝 큰 고구마 네 덩이를 넣고

180도에서 20분 돌리면

샛노란 천국을 맛볼 수 있다.



근래 최고의 발견,

고구마는 호두와 찰떡


일어나자마자 

세수하듯 고구마부터 돌리며 

하루를 시작하길 몇 달.

고구마의 찰떡을 찾아냈다. 

호두다. 

고구마를 새끼 손가락 두께로 썰어

호두 두 어 조각을 올려 한 번에 입에 넣으면

뭐랄까, 디저트를 먹는 느낌이다.

되직한데 아삭하다.

달짝지근한데 고소하다.

묵직한데 가볍다. 


그야말로 최고의 찰떡.




속 답답한 고구마같은 인간,

그게 바로 나다.


난 사실 고구마같은 인간이다.


고구마 100개 먹은 것 마냥

속 답답한 생각만 골라 한다.

땅 속에서 자라는 고구마 마냥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울퉁불퉁한 고구마 마냥 

마음 모양새가 매끄럽지 않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5년이고 10년이고 품고 살아왔다.

어울리는 일이 자신없어 

좀처럼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내 생각을 뱉고나면

자주 누군가와 틀어졌다.



쌀밥같은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대학 시절 그녀는 쌀밥을 닮았더랬다.

세상에 거리낄게 없는 것마냥

말도 행동도 매끄러웠다.

웃음소리가 크게 나는 곳엔 

항상 그녀가 있었다.

무엇보다, 

모두와 찰떡이었다.

쌀밥마냥. 


그녀처럼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일부러 밝은 척도 해보고

내키지 않는 자리에도 자꾸 얼굴을 내밀었다.

모두와 잘 어울려보려 무진 노력했다.

하지만 엄마 립스틱을 훔쳐 바른 아이마냥

어색했던 나의 노력은 대개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간혹 파국으로 치닫기도 했다.

따라쟁이 혹은 가식쟁이같은 그런 말들과 함께. 


지난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알았다.

난 그냥 고구마였다



고구마로 사는 것이

어느 순간 자연스러워졌다


'아, 나 고구마같은 사람이었지.'

에어프라이어가 구워낸

따끈따끈한 고구마를 후후 불며

오랜만에 기억을 소환했다.


그러고 보면 꽤 오래 잊고 살았다.

참 고구마같았던 그 시절을.


물론 지금도 나는 고구마같이 산다.

속 답답한 걱정도 자주 하고

사람 많은 곳엔 가지 않는다. 

생각도 울퉁불퉁하니 세상사 불만도 적지 않다.


다만, 그렇게 사는게 괜찮아진 것 뿐. 

울퉁불퉁하고 어두우며 속답답한 

내 자신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



호두같은 인연을 만났던

그 때부터의 변화가 아닐까


고구마 마지막 한 조각 위에 

남은 호두알을 모두 얹어

입 안에 넣으며 생각했다.

고구마같은 내 인생이 괜찮아진건

아무래도 Y와 S, 두 명 덕분이다. 


Y

10년동안 그에게 

조언이란 걸 들어본 적이 없다.

그냥 말 한 번 끊지 않고 

울퉁불퉁한 내 얘기를 들어준 사람.

 

S

그는 내가 보낸 카톡 1줄에

10줄로 답한다.

고구마같은 내 인생이

참 되직하니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



쌀밥으로 변신하여 

만인의 찰떡이 되는 것엔 실패했으나

고구마처럼 사는 것도 썩 괜찮다 여기게 된 건

분명 호두처럼 나타난 그 두 사람 덕이다.



날 닮은 어린이 고구마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날 똑 닮은 5살 딸이 학교에 간다.

곧 부모보다 친구가 중요한 시기가 올거다.

누군가가 부러워질거고,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할거다.

어린 마음에 누구인 '척'도 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쌀밥같은 그녀인 '척' 했던 것마냥. 


그 외로움을 내가 대신 살아줄 순 없으니

정화수 떠놓은 엄마의 심정으로

기도한다. 


호두여도 좋고,

우유나 사이다여도 좋으니

있는 그대로의 고구마같은 너와

찰떡인 인연을 만나길. 

그래서 고구마같은 삶도 

제법 괜찮단 걸 깨닫게 되길. 


그리고 

니가 만날 그들에게도 알게 해주길.

텁텁한 호두같은 삶도 꽤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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