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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Mar 11. 2019

그들의 말에 뼈 따윈 없는걸로

모든 끼니는 훌륭하다 07. LA갈비

갈비를 먹는 자는 둘로 나뉜다.


LA갈비는 언제나 옳다.

양념에 키위 갈아넣고 3일을 재운다.

오븐에서 호일깔고 20분 쯤 굽고

마무리는 팬에서 지글지글.

가위로 성큼성큼 뼈와 살코기를 분리해서

김치 한 접시와 함께 식탁에 낸다.

모두의 젓가락이 바빠진다.


이 때 갈비를 먹는 유형은 둘로 나뉜다.

뼈를 뜯는 자와 살코기를 씹는 자.

난 전자다.

오돌뼈, 닭똥집같은 '오도독'한 식감을 좋아하는 내게

약간의 살코기가 붙어 있는 갈비뼈는 그야말로 노다지.

이로 뼈와 살코기가 연결된 그 부분을 정확히 끊어

뼈를 쏙, 빼서 빈그릇에 채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딱 한 곳,

시댁에선 갈비를 뜯지 않는다.


신혼 초 시댁 식구들을 초대했다.

밥솥이 칙칙폭폭 열심히 밥을 하고 있던 그 때.

시댁 어른이 뭘 하나 들고 내게 오셨다.

어제 해놓은 밥을 덜어놓은 그릇이었다.

그리곤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 이것부터 먹어치워야지."


멈칫했다.

'나더러 저 찬밥 먹으란 건가?'

그 순간 뇌가 오래된 기억을 소환해냈다.

어린 시절 명절 풍경이었다.


커다란 상에 놓인 크고 잘생긴 음식들,

그 옆 작은 상 위에 차려진 자잘하고 못난 음식들.

어느 상에 앉느냐를 결정하는 건

결코 선착순이나 랜덤,

혹은 부엌에서의 노동강도가 아니란 걸

사춘기 때 알았다.

그렇게 난 오랫동안 작은상에서 명절을 지냈다.


시댁 어른의 '찬밥' 이야기가 섬뜩했던 건

그 시절 쌓인 나의 상처를 건드린 까닭이다.


그 후로 시댁에선 갈비뼈를 뜯지 않는다.

아무리 오도독 소리가 맴돌아도 들지 않았다.

저걸 든다는 건, 꼭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전 그냥 남은 거 먹어없애죠뭐."



자격지심은 말을 고깝게 듣게 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알았다.


"얘, 이것부터 먹어치워야지."란

시댁 어른의 말씀을


"얘, 이 찬밥은 니가 먹어라."로

해석한 건 '나'였다.

더 엄밀히 '나의 자격지심'이 그랬다.


여자라 대우받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에

그 말씀을 고깝게 들었고

그 탓에 그 맛난 갈비뼈도 몇 년을 못 뜯었다.


찬밥 계속 두면 버리게 되니

새밥에 섞어먹든 데워먹든

지금 먹고 치우자, 라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어도 되었을 것을.



분유먹여? 딸이야? 얼굴좋네?

이 말들이 고깝게 들린다면


어제 저녁, 잘근잘근 갈비뼈를 씹으며

그간 고깝게 들렸던 몇몇 말들을 생각해봤다.

혹 거기에도 내 자격지심이 있었던 걸까.


“분유먹여?”

뭐야, 모유 안 먹인다고 뭐라 하는거야?


"애가 엄마 안 찾아?"

뭐야, 애엄마가 일하러 나왔다고 독하단거야?


“둘째도 딸이야?”

뭐야, 아들타령하려고?


”얼굴 좋네”

뭐야, 살쪘단거야?


"지난달 어떤 프로젝트했지?"

뭐야, 나 성과 안 좋다고

일부러 걸고 넘어지는거야?


하나같이 가슴에 콕콕 박혔던,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니

그저 안부를 물었을 뿐인 말들.



상처받는 삶은 너무 피곤하다.

결국 잘 돌려듣거나, 안 돌려듣거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너무 피곤하단 것.

한 번 말이 고깝게 들려 사이가 서먹해지면

그 다음 말은 더 곱씹게 된다.

그리곤 바지 무릎에 난 구멍마냥 걷잡을 수 없어진다.


방법은 두 가지다.

1. 상대의 숨겨진 의중을 100% 캐치해낸다.

2. 상대에게 숨겨진 의중은 없다고 전제한다.


단, 1은 타고나야 하는데 단언컨대 난 아니다.

결론은 2다. 그냥 해석하지 않는 것.

곧이곧대로 듣는 것.


예를 들면 이렇게.


얼굴 좋네? =

와! 내 얼굴이 보기좋은가봐.

어젯밤 마스크팩이 잘 맞나보네.


둘째도 딸이야? =

우리 애한테 관심가져주네.

역시 자상한 사람 :)


지난달 프로젝트는? =

내 업무가 궁금한 모양이네.

나 회사에서 이렇게 존재감있는 사람!



어쩌면 그 때 그 분은

내게 찬밥을 먹으란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야기든 고깝게 들린단 건

자격지심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단, 그걸 건드린 건

상대방의 무례함일 가능성도 크다.

문제는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의 삶이란 것.


그 때 나의 시어른은

내가 찬밥을 먹어치우길 바라셨을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례하셨다.

하지만 내가 그분의 삶과 생각을

극적으로 바꿔놓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삶이다.

하여 나의 최선은그 말에 상처받지 않는 것.

당신의 말에 내 맘을 찌를 생각같은 건

애초에 없다고 당신을 믿어버리는 것.



갈비뼈에서 부드러운 살코기만 잘라내어

접시에 담으며 내린 오늘의 결론,


“당신의 말에 뼈 같은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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