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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 아침

모든 끼니는 훌륭하다 08. 아몬드 시리얼

by Yoon

아침 고봉밥을 먹고 자랐다.


"딸! 아침 먹자~"


그렇게 20년을 부엌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식탁 앞에 앉으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이 앞에 놓였다.

임금님 수라상까진 아닐지나

계란 프라이, 햄 한 조각이

따끈하게 구워져 나오던

엄마의 부엌에서 난 자랐다.

엄마는 현모양처였다.



젖먹이 아이와 밤을 보내고 난 아침,

고봉밥이 산처럼 느껴졌다.


나도 엄마처럼 엄마가 되었다.

식구들에게 삼시세끼 따순밥을 해 먹이는 건

꽤 큰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둘째가 태어나고

첫째가 학교에 가며 상황은 급변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땐

전날 도시락을 싸놓으면

가져가 먹을 수 있었지만

이젠 집에서 아침을 먹고 가야 한다.

문제는 요즘 이가 나려는지

밤에 홀수 시간마다 깨는 둘째.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쪽잠을 자다보면

날 밝을 무렵 내 몸은 그야말로 젖은 솜뭉치다.

그런 내게 '아침상' 3글자는 많이 무거웠다.



남편이 말했다.

"시리얼 있잖아. 뭐가 걱정이야."


남편은 늘 그래 왔듯 명료했다.

시리얼에 우유 부어 먹으면 충분하다 했다.

하지만 내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좀 그렇잖아."


남편은 더 이상 코멘트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운

그의 고개가 말했다.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거?"


그러게. 뭐가 '좀 그렇다'는 걸까?



생각보다 자주 말했다.

'그래도 좀 그렇잖아.'라고


생각해보니 일명 '좀 그렇잖아'

시리즈는 꽤 다양했다.


"분유 먹이는 거 좀 그렇지 않아?"

첫째가 젖을 물지 않아

몇 달을 유축에 고통스러웠지만,

분유만 먹이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랬다'.


"선생님한테 말대꾸하는 거 좀 그렇지 않아?"

감정적 체벌이 흔했던 학창 시절,

강당에서 골프채로 맞으면서도

선생님께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랬다'.


"사수보다 일찍 퇴근하는 거 좀 그렇지 않아?"

내 일을 다 마쳤다 해도,

키워드가 부서져라 뭔가를 하고 있는 사수에게

'먼저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좀 그랬다'.


선생님 말 잘 듣는 성실한 학생

아이에게 희생하는 자애로운 엄마

척척 제할 몫 이상을 해내는 직장인


일명 인생의 모범답안들에서

벗어났기에 '좀 그랬다'.


그래서

큰 우울감에도 유축을 멈추지 못했다.

골프채로 맞는 게 잘못됐단 생각도 못했다.

퇴근은 늦어졌고 야근은 잦아졌다.


단 한 번도 되물어본 적이 없었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되묻고 스스로 생각하고 나서야

뒤늦게 맞닥뜨린 진실은 이랬다.


분유도 충분히 좋은 성분을 가지고 있다.

되려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수유가 독이다.

스승은 감정적으로 제자들을 체벌해선 안된다.

혹 그랬다면, 선생님이 아니라 가해자다.

9시에 왔다면 6시에 갈 수 있어야 한다.

근로계약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


결론은 명료했다.

그때의 나, 꼭 그래야 하는 게 아니었더라.



시리얼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른 '좀 그런 것'들도 그럴지 모른다.


며칠 전, 아이와 함께 마트에 갔다.

시리얼 코너에 한참을 머물렀다.

아이는 견과류가 많이 들어간,

표지가 알록달록한 시리얼들을 골랐다.

난 그중 설탕이 가장 적게 들어간 걸 추렸다.



오늘 아침, 아이는

아몬드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맛있게 먹곤

입가에 하얀 수염을 그린 채로 학교에 갔다.


덕분에 난 너무 애쓰지 않아도

꽤 괜찮은 아침을 보냈다.

최고는 아닐지나 충분한 최선이었다.



'좀 그런 것들'이

생각보다 많고, 잦았다.


둘째를 재우고 건조기를 돌린 참이다.

며칠 전 이웃이 가져다준 둘째 옷이 한가득.

이건 둘째 입힐 옷, 이건 다른 집 줄 옷.

아이 옷을 나누다 문득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둘째 옷장으로 갈 옷들은 죄다 분홍색,

다른 집 가져다줄 옷들은 죄다 파란색이다.


'여자 애기 파란 옷 입히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모양이다.

건조기 먼지를 떼며 곰곰이 생각했다.

여자애라고 파란 옷 꺼려할 이유가 0도 없었다.

둘째는 되려 파란색을 입을 때

낯빛이 좀 더 화사했다.



시리얼과 파란옷처럼

우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좀 그런 것'에 묶여 산다.

생각해보면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때론 그래선 안됐을 그런 것들.


사실 진짜로 '좀 그런' 건 따로 있지 않을까.

남들이 그렇다면 그냥 그런 줄 알고 사는,

바로 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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