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끼니는 훌륭하다 12. 구운 오징어
영화를 볼 때면 오징어를 구웠다.
상상만으로 설레는 시간이 있다.
보고 싶었던 영화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다.
오늘은 손바닥만 한 폰 말고
65인치 TV로 봐주는 날이다.
바닐라 라테에 얼음 가득 채운 스댕컵이
기분 좋게 차갑다..
겨드랑이에 받치고 누울 베개를 세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운 오징어와 마요네즈 종지를
담요덮은 무릎에 올려놓는다.
상상만으로 금요일이다.
할머니가 그러셨다.
넌 이가 있어 좋겠다고.
10년도 더 된 어느 날도
난 구운 오징어를 질겅이며
TV 앞에 반쯤 누워 있었다.
질겅질겅. 씹을 때마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짭짤함을 만끽하고 있던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이가 있었으니,
할머니셨다.
혼잣말이었을까, 내게 말을 건네신 걸까.
“너는 이가 있어 좋겠다.”
그리곤 보리차에 밥을 말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잡수셨더랬다.
이가 없는 나를
상상해보지 못했다.
오징어 덕에
오랜만에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마주했다.
그리곤 생각했다.
'그렇네. 나도 언젠간
오징어를 씹지 못하게 되겠네.'
오징어뿐일까.
갈비뼈에 붙은 쫀득한 갈빗살도,
오돌뼈도, 곱창도.
내가 좋아하는 쫀득쫀득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만 봐야 하는 날이
언젠간 온다.
언젠간 잃게 될 것이 '이'만은 아니다.
하굣길 5살 첫째와의 산책 타임
4달 된 둘째에게 나는 아기 냄새
가고픈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눈
나를 위해 비워져 있는 사무실 내 자리
밤이고 낮이고 부를 수 있는 우리 엄마
딸의 아이스크림 셔틀을 자처하는 우리 아빠
말없이 파리를 잡아주는 내 남편
왜, 이 행복에 유통기한이 있단 걸 잊고
허투루 대했을까.
지금 엄마품만 파고드는 요 녀석도
언젠가 엄마 전화를 귀찮아할 때가 올 텐데.
엄마가 그랬다.
"넌 엄마가 있어 좋겠다."
딸에게 엄마란 그런 존재다.
즐겁고 행복하고 설레는 기분도
화나고 슬프고 서운하고 괴로운 기분도
필터 없이 툭툭 던지는 그런 존재.
그때의 나도 그러던 참이었다.
세탁 후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였을까.
고기반찬 없는 식탁이었을까.
아무튼 난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날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그리고 힘없이 그러셨다.
"좋겠다. 넌 엄마가 있어서."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유통기한이 짧게 남은 것.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