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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만세 Nov 12. 2018

처음은 바뀌지 않는다.

#4.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기적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지구 반대편에서 나는 일주일을 살았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하루를 3일처럼 살고 싶었지만 마음뿐. 사람은 참 바뀌지 않는다. 피아노 연습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무한대로 커피를 마시다가 오전을 다 보낸 날도 있고, 비가 와서 나가기 싫다고 진짜 카우치에 드러누워 있다가 등 떠밀려 억지로 나온 날도 있다. 비 오면 나가기 싫은 것도 똑같구나. 런던이고 뭐고..


안나가고 돈 세는 중 (feat. 이반)


그렇게 계획 없이 지내는 와중에도 여기만큼은 꼭 가봐야지 생각한 곳은 있다. 이를테면 포토벨로 마켓 같은 곳. 영화 ‘노팅힐’에 나와 더 유명해진 포토벨로 마켓은 토요일에만 열리며 입구부터 앤틱 거리, 잡화 거리, 과일과 채소 거리가 펼쳐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런던에서 요일 감각을 상실한 나는 코벤트가든의 벤스 쿠키에 널브러져 핫초코를 홀짝이다가 문득 '어? 오늘 토요일인가?'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후 4시쯤의 일이었다. '마켓은 토요일에만 열림'에 빨간펜으로 별 다섯 개 그려놓으면 뭐하냐고.. 부랴부랴 핫초코를 원샷하고 노팅힐로 달려갔다.


역에서 표지판을 따라 10분 정도로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 걷기만 해도 찾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도착해보니 해지는 거리를 따라 역으로 돌아오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너무 늦게 왔나봐.. 나만 반대로 걷고 있어..


마켓은 하나 둘 정리하며 파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나마 문이 열려있던 일반 상점들, 서점과 레코드숍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와중에 coldplay의 처음 보는 싱글을 사들고 신나서 돌아왔다.


버킹엄 궁전에서도 그랬다.

버킹엄 궁전은 런던의 대표적 관광지로 보통은 사람이 많아서 일찍 가지 않으면 근위병을 가까이서 보기 어렵다고 들었다. 그 날은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아니었기에 나는 궁전 대문에 바싹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다가 철창 사이 틈에 톰을 세워보았다. 버킹엄 궁전을 배경으로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톰을 찍으려고 돌아서는 순간 휙 바람이 불었다.


기마경찰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고, 눈앞에서 교대식이 펼쳐졌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철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봤지만 더 이상 안 들어간다.. 옆에 있는 외국인에게 우산을 빌려볼까. 우산 손잡이로 끌어당기면 될 것도 같은데.. 하지만 그곳에 모여있는 모든 사람이 사진 찍느라 바빴기 때문에 말을 걸기도 쉽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근위병이 모두 궁전 안으로 들어가고 대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문을 닫고 있는 회색 제복의 관리인에게 황급히 달려갔다.

"기다려달라! 정말 미안한데 내 인형이 지금 저 안쪽으로 떨어졌다. 제발 주워달라!" (이 정도 느낌이었을까)

관리인은 순식간에 엄격한 표정으로 변했다. 궁전 밖의 사람과 절대 이야기하면 안 되는 룰이 있나 싶었다. 그녀는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척척 걸어가더니 떨어져 있는 톰을 발견하고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이런 거 절대로 안으로 던지면 안 돼!"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철창 사이로 톰이 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땡큐쏘마치 ㅜ ㅜ 교대식 사진 대신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갑니다..


뒤에 타워브릿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런던에는 유명한 것들이 정말 많지만 6년이 지난 지금 기억에 남은 것은 이런 에피소드뿐이다. 내가 소소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크고 작은 바보짓으로 유명한 것들이 유명한 이유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구나. 다시 가서 잘 구경하고 싶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늦은 오후 비행기였기 때문에 여유롭게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 들렀다. 런던에 오기 전에는 애비 로드 스튜디오가 당연히 리버풀에 있는 건 줄 알았다. 비틀즈 앨범 대부분이 이 곳에서 녹음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라고 평가받는 마지막 앨범 <Abbey Road>가 발표되면서 이 곳도 함께 유명해졌다.


비틀즈 <Abbey Road> 앨범 커버


애비 로드 앨범 커버는 스튜디오 앞 횡단보도에서 촬영했는데 불화가 절정이었던 시기, 해체 직전의 비틀즈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앨범 제목조차 쓰여있지 않은 이 한 장의 사진이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앨범 커버로 손꼽힌다. 당시 사이가 안 좋아서 따로 스케줄을 잡지 않고 스튜디오 앞에 나가서 10분 만에 촬영했다는 후문이 있던데. 진짜 10분 만에 찍진 않았겠지만 어쩌면.. 음악 역사상 가장 대충 만든 앨범 커버일 수도 있다. 역시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아무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횡단보도에서 인증샷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차를 피해 유쾌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벽에도 팬들의 낙서가 가득하다.
앨범 커버 뒷면에 등장하는 ABBEY ROAD NW8.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을 더한 4차원에 살고 있지만 절대로 시간이라는 차원을 알지 못하도록 생겨먹어서 3차원까지만 인지할 수 있다고 하던데.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공간에 가면 시간을 초월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사랑이라고 인터스텔라의 브랜드 박사가 그랬지. 많은 사람들의 애정이 가득 담긴 공간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내게 런던은 새로운 곳이었지만 새로운 내가 되지는 않았다. 익숙한 곳에 있어도 내 마음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지만 이미지로만 알던 풍경이 실제로 펼쳐져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만으로 내내 가슴이 벅차 순간순간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았다.


같은 날, 나보다 먼저 콘서트를 위해 홍콩으로 떠난 이반은 나에게 열쇠를 건네주면서 뒷일을 부탁했다. 매일 앉아서 커피를 마시던 탁자에 편지를 써두고, 미리 약속한 비밀의 장소에 열쇠를 잘 숨겼다.


무뚝뚝한 영국인들의 다정한 주름. 퉁명스럽게 던지는 염려. 무심한 듯 참견하며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순간들. 나에게 런던은 첫 서양, 첫 유럽, 아시아를 벗어나 처음 발을 디딘 땅, 첫 혼자만의 여행, 첫 카우치서핑이었으므로. 그 많은 처음의 경험과 마음들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런던 병'이 되어 나를 덮쳤다.


'처음'이란 그렇다. 처음은 바뀌지 않는다.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기적 같은 것.

막연한 믿음 하나로 낯선 사람이 낯선 사람이 아니게 되고 그곳에 무언가 두고 온 것처럼 줄곧 마음이 쓰이는 것. 그렇게 오래오래 가슴 깊이 남아 다시 돌아갈 꿈을 꾸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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