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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만세 Oct 21. 2018

피아노맨 이반의 집

#3. 두렵지 않은 척 만난 두 번째 호스트

첫 카우치서핑의 두 번째 호스트 이반.

남자 혼자 사는 집에는 가지 않으려 했으나 그의 집에 머물렀던 수많은 게스트들이 남긴 좋은 리뷰에 마음이 움직였다. 말리는 친구들에게는 괜찮을 거라고 큰소리쳤지만 걱정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홍대 앞 운짱이었던 나를 믿고 질러버렸다. 이건 모험이다!

저녁이 다 되어 Chalk Farm역에서 만난 이반은 거인처럼 보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눴지만 내 캐리어를 번쩍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이대로 끌려가는 거 아냐? 집안에 감금되는 건 아니겠지?? 내 발로 따라간 거라 범죄 성립이 안될지도 몰라. 밤에 갑자기 덮치면 어떡하지??? 신고할 수 있을까, 나 영어도 못하는데 ㅜ ㅜ 그 많던 리뷰가 다 조작은 아니겠지... (feat. 마음의 소리)


이반은 피아니스트다. 도착한 그의 집 거실에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그는 집 구조를 간단히 설명해주고 신발은 여기에서 벗어라, 추우면 이렇게 온도를 올려라, 양말같은 건 이 위에 널어두면 빨리 마른다는 식의 팁을 일러주었다. 이반은 얼리어답터 애플 유저로 당시 한국에는 출시 전이던 아이폰5뿐 아니라 아이패드, 맥북, 그리고 굉장한 스테레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What's this???
Wow! Cooool! Amazing!!!


난데없이 집안 가득 울려 퍼지는 사운드에 나도 모르게 알고 있는 모든 감탄사를 쏟아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거 블루투스 스피커다. 당시로서는 접해본 적 없는 신문물. 내가 엄청난 반응을 보이자 그는 내 아이폰에도 스피커를 연결해주면서 듣고 싶은 음악을 틀게 해 줬다.

좋은 사람이잖아..! (경계심이 무너진 순간)

WhatsApp(한국의 카카오톡처럼 유럽 국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메신저)도 다운받아 주었는데, 집 열쇠가 하나뿐이니 지내는 동안 WhatsApp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귀가시간을 맞추자고 했다.



그가 만들어둔 닭요리와 샐러드를 함께 저녁으로 먹고 동네 펍에 맥주를 마시러 갔다. 그는 불가리아 사람이지만 EU 덕에 런던에 와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EU의 좋은 점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아시아에도 아시아 연합 같은 것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나저나 브렉시트는 어떻게 되는거지..?


이반이 빌려준 게스트용 매트리스는 기숙사 바닥에 비하면 훨씬 편안한 잠자리였다. 근심 걱정을 빠르게 내려놓은 나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의 집에서 편하게 지냈다.

이반은 이른 아침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그 소리가 알람처럼 매일 나를 깨웠다. 곧 홍콩에서 콘서트가 있다고 했다. 피아노 치는 피아니스트를 바로 옆에서 보고 있다니..! 감탄하며 박수를 보내면 "이건 play(연주)가 아니야. Just practice(연습)이야." 정색하고 레슨을 위한 것과 공연을 위한 것 운운하며 설명하는데, 나는 그 차이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 귀엔 다 똑같이 들린다고..


소금과 설탕 없이는 아무 맛도 안난다는 걸 깨달음


다른 스케줄이 없으면 이반은 매일매일 오전 내내 피아노를 쳤다.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시리얼과 과일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이반의 피아노 '연습'을 한참 구경하다가 고새 쌓인 설거지를 대신해주고 집에서 나오곤 했다. 설거지는 바로바로 해야 한다는 잔소리도 괜히 덧붙여가며.



한강에 쏙 들어갈 것 같은 템즈강을 건넜다가 다시 건너오고, 버스 2층 맨 앞자리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고, 버스킹 밴드의 음악에 취해 가진 동전을 전부 털어주고, 시내 한복판에서 만난 한국 마트에서 좋아하는 컵라면을 두 개 사고. 하루를 다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인사로 "Did you have a good day?"라고 묻는 게 참 좋았다. 난 또 사전을 뒤져가며 그 날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했다. 영어로 말하기에 모든 에너지를 써버려서 그만 자고 싶어도 이반은 이야기 끝에 "너 이거 알아?"하면서 유튜브에 있는 온갖 웃긴 영상들을 보여줬다. 특히 미스터 빈 영상을 볼 때 그는 숨이 넘어가도록 낄낄대며 "So funny! He's Crazy!!!"를 연발했는데, 나는 영상보다는 다 큰 어른의 그런 모습이 웃겨서 웃었다.


이반도 맛있게 먹었던 코리아 대표 사발면
버스 2층 맨 앞자리 뷰


그는 모르는 뮤지션의 곡도 매일 추천해주었는데, Tracy chapman의 Fast Car 라이브에 나는 완전히 꽂혀서 “원 모어! 원 모어!”하며 수없이 영상을 돌려봤다. 그 날은 이반이 먼저 지쳐서 이제 그만 잘 시간이라고 했지.

지금도 나의 훼이보릿 중 하나인 이 곡은 런던 여행 테마로 남아서 들을 때마다 런던의 풍경과 이반의 집, 졸린 눈으로 유튜브를 보던 그 밤이 떠오른다.


이반의 집에서 지내면서 나는

정말 일만 하고 살았구나.
맥북을 사야겠다.
이반처럼 회사 안 다니는 직업을 가져야겠다.
역시 웃긴 게 최고야.
유교사상 없는 게 이렇게 좋다니.
나이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반이 몇 살인지도 모른다.)
서양인들은 추위를 안 타나. (반팔에 반바지라니.)
자리 많은데 왜 밖에 서서 맥주를 마시는 걸까. (비도 오는데??)
변기 수압이 정말 세다.
비가 와도 우산 안 쓰고 다닐 수 있구나.
심플하게 살고 싶다.
좋은 냄새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 이반의 콘서트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다짐을 했다.



카우치서핑. 이거 하나 믿고 비행기표만 들고 진짜로 런던에 오다니. 특별한 계획 없이 그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뿐이었지만 하루의 끝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를 안심시켰다. 막연한 믿음 하나로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영어를 잘했으면 더 많이 주고받았겠지..라고 매일 밤 생각하긴 했다.

맛있는 케이크를 먹게 되는 날에는 꼭 두 개를 포장해 가져왔고, 바쁜 이반을 대신해 로우 슈거 밀크를 사러 가기도 했다. 로우 슈거는 파란색 라벨이야! 기억해 파란색!!!이라고 몇 번이나 당부해서 유치원생이 된 기분으로 슈퍼를 찾아갔었지.

혼자였다면 하지 않았을 이런 사소한 일들이 런던에서의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 줬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경험.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고 (에어비앤비의 캠페인 슬로건이지만) 그때부터 난 생각하게 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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