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만세 Oct 12. 2018

런던에 가고 싶어서 카우치서퍼가 됐다.

#1. 신뢰만으로 가능한 여행의 방식

학자금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던 가난한 사회 초년생 시절, 나는 우연한 기회로 카우치서핑을 알게 되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듯이 "나 며칠만 재워주라" 요청하고, 일정이 맞아 호스트가 "오케이"하면 약속한 기간 동안 그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친구가 된다. 당연히 숙박비는 필요 없다. 이런 커뮤니티가 실제로 존재하고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니.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바로 내가 꿈꾸는 지구촌의 모습이야! 모두가 친구가 되는 세상!


지금은 나도 에어비앤비를 자주 이용하지만 카우치서핑은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진정한 공유의 여행 방식으로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실제로 카우치서핑은 공짜로 숙소를 해결하는 것보다 문화적 교류의 의미가 훨씬 크다. 하지만 공짜 숙소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 아무튼 나는 카우치서핑을 알게 되면서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영국에 갈 결심을 하게 됐다.


주소를 인증하고 받은 카우치서핑 스티커


그리하여 2012년 11월, 톰의 여행이 시작됐다. 데이빗 보위의 곡 스페이스 오디티에 등장하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바로 그 메이저 톰. 내 톰은 사실 주방용 설거지 솔이지만 혼자 다니면 사진을 찍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톰을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톰의 첫 여행지는 런던이다. 톰의 가슴팍에 유니언잭이 그려져 있기 때문인지, 내가 비틀즈마니아이기 때문인지. 첫 서양은 당연히 런던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런던의 호스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 좀 재워달라고.


못하는 영어로 최선을 다했던 흔적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카우치를 빌려주겠다고 먼저 메시지를 보내오는 남자들은 꽤 있었지만, 미지의 세계로 혼자 가는 마당에 최소한의 신뢰는 필요했다. 적어도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내가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여야 했다.

호스트의 프로필을 꼼꼼하게 읽고, 레퍼런스(게스트가 남긴 리뷰)를 하나하나 살피면서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카우치를 요청했다. 내 프로필에는 재미있는 사진을 잔뜩 올려놓고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나 엄청 웃겨'라는 이미지를 주려고 애썼다. 결국 떠나기 직전 2명의 호스트가 내 카우치 요청서를 수락해주었다. 수락 메시지를 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카타르 도하를 경유해 런던으로 가는 머나먼 여정


살면서 이렇게 멀리 와보긴 처음이다. 오면서 지금까지 내가 본 건 구름, 구름, 구름과 올려다보지 않아도 창밖에 흩어져 있는 별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시간을 거슬러 가는 길. 세상엔 정말로 쉬운 게 없다. 어딘지도 모르는 땅 위에 떠서 치킨 샌드위치를 먹고 콜라를 마시고. 치킨 샌드위치를 먹고 콜라를 마시고. 다른 메뉴는 알아듣지 못해서 계속 치킨만 먹었다.

끝도 없이 가는 길이 지겨워질 때쯤 독일 땅이 내려다보였고, 곧 영국이 나타났다. 히드로 공항에 내려 전 세계에서 날아온 비행기들을 보는데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와 울컥하고 말았다.


여행 내내 함께한 튜브맵과 2012 런던올림픽 한정판 오이스터 카드


공항에서 튜브(영국의 지하철)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 낑낑거리며 처음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 거리의 느낌을 나는 잊지 못한다. 영화에서나 봤던 건물들, 빨간 전화부스, 블랙캡과 2층 버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녔다. 가까운 곳에 빅벤과 런던아이가 보였다. 진짜 런던이다.



와 이거 다 진짜 있었구나!
진짜 있는 거구나!




그렇게 거리에 한참을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나는 카이얀을 만나야 한다. 2시 반에 Charing Cross역 앞에서.


그런데 만나기로 한 장소에 그녀가 없었다. 사실 내가 제대로 찾아왔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같으면 WhatsApp으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겠지만 2012년 유럽 땅에 처음 발을 디딘 당시의 나로서는 그녀가 남겨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 유명한 전화부스에 들어갔지만 어떤 동전을 넣어야 하는 줄도 몰라서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동전을 전부 구멍에 밀어 넣었다. 통화가 연결되어 반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바로 끊어져버렸다.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니야. 그래도 내가 런던에 오긴 왔다는 걸 그녀가 알게 됐겠지.'

나는 한줄기 희망을 품고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역 앞에 서있었고 또 역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역에서 막 나오는 인상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내 사정을 말하고 전화 한 통만 쓸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휴대전화를 꺼내 카이얀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카이얀, 나 윤이야! 런던에 왔어. 2시 반에 역 앞에 갔는데 너를 못 찾았어."
"역이 워낙 커서 방향이 엇갈렸나봐. 내가 그쪽으로 갈게. 지금 어디야?"
"역 안에 있는 버거킹 앞에 있어."
"어디라고?"


내가 아무리 영어를 못한다지만, 그래도 "I'm in front of Burger King."정도는 제대로 말한 것 같은데 카이얀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버↗거킹! 버거↘킹! 버↗걸 킹! 벌↘거킹! 벌걸 킹! 벌걸↘킹!!!!!!!!!

버거킹만 10번 정도 말하고 나서 전화기를 빌려주신 아주머니께 여기가 어디인지 좀 설명해달라고 휴대전화를 넘겨드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카이얀과 통화했고, 몇 분 뒤 카이얀이 버거킹 앞으로 달려왔다.



아주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카이얀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고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캄캄하다. 그녀를 못 만났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 영어로 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아무 숙소나 찾아서 일단 카드를 긁었을까..

수만가지 생각이 스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아주머니께 거의 절하다시피 인사하고 한국에서 가져간 카드를 선물로 드렸다. 그 와중에도 “이거 제가 만든 거예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덕분에 영국사람은 친절하다는 편견이 생긴 채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고맙습니다..ㅜ ㅜ



다음 편에서 계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