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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Feb 12. 2022

기억

기억이 문득 찾아오곤 한다.


카페에서 베이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 때라든지, 마트 계산대에서 바코드가 읽히는 소리를 듣고 있을 때라든지, 갑자기 어떤 흐릿한 이미지가, 느낌이, 눈 앞에 뿌옇게 몽롱하게, 완성되지 않은 장면으로 재생된다. 중심만 어렴풋하게 드러나고 주변은 흐릿하다. 분별되지 않은 감정들이 따라온다. 어떤 슬픔, 그리움, 쓸쓸함, 연민, 부러움. 장면이 감정을 가져왔는지, 감정이 장면을 불러들였는지. 그 마음들이 스치고 나면 다시 현재의 내가 있다. 베이글을 쳐다보거나, 바코드 소리를 듣는다.



기억은 시간을 건너뛰어 아홉살, 열살로 돌아간다. 지나 온 줄도,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과거가 한 점씩 부분으로 펼쳐진다. 배경은 주로 미국, 등장인물은 삼십대 후반의 엄마, 아빠, 그리고 어린 나와 언니.


푸릇푸릇한 시간, 구슬같은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엠앤엠 초콜렛 알갱이, 과자로 만든 지도, 일요일 교회를 갈 때마다 들었던 분홍색 펠트 가방, 다이빙대와 수영장, 튀기는 공, 친구네 집 고양이, 캠프와 반딧불, 우윳빛 은하수, 마시멜로우와 캐롤, 컨트리 음악, 이층 침대와 인형들, 얇고 푸른 바인더 종이와 노란 연필 - 이것들은 내가 알고 있는 기억이다.


하지만 요즈음 나를 찾아오는 장면들에서 어린 나는 방실거리며 저 뒤편에서 기웃대고, 카메라는 각도를 틀어 그 때 함께 있었던 어른들을 보여준다. 무언가 좋은 느낌을 주었던 그 사람들, 그리고 엄마 아빠.



“사람들은 홀로 견디지 않는다. 그들은 한 쌍으로서 살아남는다. 서로 사랑하는 커플의 일원으로서, 같이 늙어간다. 치료할 수도 떼어내 버릴수도 없는 병으로 때 이른 이별을 할 위험에 더 이상 처하지 않은 채로. 이 때 몸의 충족감이란 곧, 사랑하는 상태에 있는 것, 함께 존재하는 것, 둘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People do not endure alone; they survive in pairs, as part of loving couples who age together, no longer in danger of premature separation caused by incurable and inexplicable disease. Here, bodily fulfillment refer to being in love, to existing in a state of togetherness, to constituting a community of two.”*



샐러리, 워터크레스, 망고, 가르니에 라벤더 크림 같은 것의 바코드를 찍는 나와, 큰 카트에 가족이 먹을 일주일 치 식재료를 담아 계산대에 서 있던 엄마, 카트를 끌고 주차장으로 가 차 트렁크에 봉지들을 옮기던 아빠. 원헌드레드 핍프티 달러? 오마이갓, 우리 이렇게 많이 먹어? 긴 영수증을 들고는 놀라던 언니. 영어를 잘 하지 못하던 엄마와 영어를 잘 하지 못하던 아빠, 두 사람, 네 식구, 함께 툴툴대고, 서로 짜증내고, 함께 웃는다. 우리만의 문화, 우리만의 유머. 언니와 나를 태우고 집으로 가던 그 자동차 앞자리에서는 그들만의 고민이, 난 몰랐을 다툼과 화해가 있었을 것이다. 엇갈린 듯 스러질 듯 기댄 채로, 둘이 선택한 경로와 둘이 만들어나가는 삶.


그리고 기억의 수면을 들여다보는 지금의 내가 있다. 장바구니에 사과와 파스타와 키친타올을 담고 있다. 긴 구름이 걸린 하늘을 보면서 어깨 한 쪽씩 가방을 지고 거리를 걷는다. 지금의 삶, 홀로 산책하고, 친구를 만났다 헤어지고, 글을 읽고, 생각하고, 혼자 조용하고 시끄럽고, 즐거워하고 감사해하고, 스스로 북돋고 조금씩 단련하는 현재의 나. 이곳이든 저곳이든 크게 다르지 않구나, 어떤 시간의 마디들은 스스로 맴돌며 보내야 하는구나, 하며, 오늘의 나에게 찾아온 기억과 함께 일렁인다.





* Nancy Spector, Felix Gonzalez-Torres (New York: The Guggenheim Museum, 1995), p.143

번역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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