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홍대 교육원 사물함에 맞겨둔 동양화 재료를 찾으러 안국에서부터 동교동까지 버스를 탔다. 가는 길에 BBC Radio Arts and Ideas 에서 진행하는 Essay Writing 에 대한 팟캐스트를 들었다. 에세이에 대한 대학 강의를 하는 작가부터 유명 에세이스트, 에세이 편집자, 불문학자가 출현해 에세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쓰기 시작하는가에서부터 에세이의 시초로 여겨지는 몽태뉴의 <수상록>, 오늘날 쓰여지는 에세이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여러 주제를 다루었다. 그 중 나를 다시금 쓰고 싶게 만드는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 인용해본다.
다른 논픽션 글쓰기와 다른, 에세이만의 독자적인 특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Kirsty Gunn 의 답변이다.
"에세이는 무엇보다도 불확실함을 향해 가는 글쓰기이다. 에세이는 어떤 화두에서 시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온이나 빛의 성질이나 어떤 이미지나 문장 같은 것에서 말이다. 다만 그 이후에는 화두를 주워 들고 그것과 함께 갈 수 있는데까지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세이는 하나의 시작과 그 이후의 진행에 대한 것이다. 규범을 따르는 글쓰기나 계획된 글쓰기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에세이는 아니다.
나는 'peeve rock'이라는 스코틀랜드 파이프 음악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아름다운 형식의 음악에서 출발해서 나는 이제 온갖 종류의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 될지는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음악에서 출발해 나는 온갖 장소들로 간다. 예컨대 나는 문학과 사상들에 대해 읽기 시작하고, 풍경이라는 개념, 역사, 개인사, 지성사 등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내가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는 정말로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글쓰기 과정이 끝날 때 즈음 나는 내가 사고하던 그 주제에 몰두해 나 자신을 온전히 끌어넣었음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세이 쓰기란 스스로 가게끔 내버려 두는 글쓰기, 사고의 끝자락까지 스스로를 밀고 나가는 글쓰기, 그래서 결국 우리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글쓰기이다."
대담자들은 좋은 에세이의 조건으로 다음을 든다: 호기심, 자기 자신으로서 가감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용기, 다루는 주제에 대한 겸손함, 형식에서의 자유로움, 내용과 형식의 순응, 글쓰기 능력.
그러니까 에세이란 호기심, 탐구심, 겸손함이라는 인간의 소박한 자질이 두드러지며 한 개인 지성의 힘과 매력이 발휘되는 글쓰기이다. 나 자신, 대상, 세계와 대화하는 장소이자 이를 문장을 다루는 미적 감각으로 담아내는 소품이다. 대담자 중 한 사람은 에세이라는 이 개인적이며 다원적인 장르가 문학의 가장 고결한 형식일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에세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 장르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대다수가 에세이이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는 이들은 훌륭한 에세이스트들이다. 자신이 살아낸 삶과 세계에 대한 시선을 흡인력 있는 구성과 매력적인 문장으로 담아내어, 마음을 달싹거리게, 쥐락펴락 질투나게 하는 사람들 말이다. 문장은 담담하고 담백하고 신선하다. 일상 경험이나 동시대 예술 현상을 다루는데, 그 사람을 경유하고 나자 이 현상들은 전혀 다른, 베일을 두른, 의미의 꺼풀들로 겹겹이 둘러싸여진 존재가 되었다. 에세이 속에서 미적으로 재창조된 세계에 나는 우선적으로 설득된다. 아름다운 형식을 입은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거리를 얻기까지 오랜 시간을 들인 의식적인 사유 과정이 필요할 정도로, 매력적인 글 앞에서 곧바로 나는 이들처럼 말하고 이들처럼 보고자 한다.
장차 다루고 싶은 많은 주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길을 걷다가 나는 '패션에 대한 아주 멋진 글을 쓸거야.' 라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혹은 조각에 대해 탐색하고 있는 지금의 여정을 에세이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다. 식물은 나의 학술적, 문학적 글쓰기와 상상력의 요체이다. 또한 돈, 기호로서의 상품, 소비, 사랑, 결혼, 연애심리가 상호 얽히며 형성하는 매혹적이며 불가해한 역학은 언제나 나를 쓰고 싶게 만든다. 한 인간의 연애를 낱낱이 기술하는 것은 분명 가장 미시적이고 정동적인 사건으로부터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인 함축을 이끌어내는, 현실적이고 유의미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미시와 거시, 감정과 이성, 이상과 현실, 역사와 미래를 꿰뚫는 흥미로운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