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콕에 다녀왔다. 태국이나 베트남 같이 국민 대부분이 불교를 믿어 불교문화가 삶의 일부인 나라에 방문할 때면 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곤 한다. 특히 남방 불교의 사원들이나 사찰에 가면 그들의 의례나 건축과 미술이 우리와 사뭇 달라 흥미롭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요즈음은 불교의 사상에 관심이 가고 있다.
불교의 대표주자인 부처라는 인물은 수행을 통해 무언가 깨달았다고 하는데 난 항상, 도대체 무얼 깨달았기에 이를 중심으로 종교까지 수립될 수 있었을까? 그 깨달음의 요체는 무엇인가, 이것이 궁금했었다. 이번 기회에 부처에 대해 알아보면서 그의 깨달음이 근래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화두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의미있는 통찰이기에 여기에 정리해본다.
부처의 깨달음에 대한 한 논자의 해석에 따르면 (이 전제를 앞서 밝혀둔다. 부처의 사상에 대한 다른 해석 또한 있을 수 있다) 부처의 출발점은 이러하다:
'있는 그대로의 우주와 인간을 바라보자. 세계가 어떠하다는 온갖 주장들을 일단 멀리하자.'
그리하여 부처는 우주의 원리나 신, 인간의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그가 관찰,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그는 그만의 우주관과 인간관을 주장하는데, 이름하여 연기론과 무아론이다. 연기론이란 세계가 어떠한지를 설명하는 부처의 사상으로, 연하여 일어난다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원인과 결과로 얽혀 형성되어 있기에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생겼다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떤 독립적 실체가 있지 않다. 어떤 사건도, 사물도, 감정도, 생각도 다 다른 무언가의 영향으로 생겨나고, 이는 또 다른 무언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 조차도 수많은 원인과 결과 속에서 출현하는 임시적 존재이자 과정적 상태에 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는 부처의 무아론에서 '무아'란 영원히 변치 않는 궁극적인 실체로서 내가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나'라는 자아, 정체성, 실체, 불변하는 본질이 있지 않고 '나'는 인적, 물적, 사회적, 역사적, 개인사적, 유전적 조건들의 교집합 속에서 일시적으로 생겨나며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나의 인식, 지각, 감각, 감정, 감수성 모두 그러하다.
이러한 우주론과 인간론을 바탕으로 부처는 네 가지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사성제), 이름하여 고, 집, 멸, 도 이다. '고' dukkha란 통상 괴로움으로 이해되지만, 그보다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용이하다. 무엇이? 거시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모두가 겪는 태어남, 죽음, 늙음, 병듦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개된다. 그 외에도 취직, 승진, 부의 축적, 사랑, 이별 등 중요한 삶의 사건과 관계들에는 개인의 의지 혹은 노력과는 별도로 운, 우연, 운명 등의 요소가 작용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나의 뜻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거기서 나도 내 뜻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이 상황은 괴로움을 준다.
왜 그러한가? '집' 은 이 한계 상황의 원인을 지적하는 부분으로, 부처는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고통이 시작된다고 본다. 나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과 이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멸'은 수행의 목표를 이야기하는 부분으로 수행은 이러한 집착을 멸하고자 한다. '도'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부처는 여덟가지 올바른 길 (팔정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르게 보기, 바르게 생각하기, 바르게 말하기, 바르게 행동하기, 바르게 생활하기, 바르게 정진하기, 바르게 깨어 있기, 바르게 집중하기' 가 그것이다. 이 여덟가지는 본질적으로 다시 하나이며, 그 핵심은 바른 영역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무엇이 바른 것인가? 어떤 것이 참된 노력인가? 그 수행 방식에는 여러 결이 있겠지만, 핵심은 집착과 맹목적인 쏠림에서 벗어나 자기를 객관화하며 연기 상태에 있는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다. 통상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면서 상황 속에 몰입해서 살아가지만, 이로부터 물러서서 이를 객관화하며 있는 그대로 인식하라는 것이다.
명상과 수행이 이를 위한 방법 중 하나이다. 자신과 세계를 외부적 사태처럼 관찰하여 몰입하지 않음으로써 집착에 매몰되는 자신을 되찾을 수 있으며 내면과 외면의 흐름을 관조하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로써 삶을 쉽쓸리지 않고 창조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에 더해 팔정도에는 실제 어떤 생활을 하고 말을 하고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생활 또한 그 핵심에는 모든 것이 여러 인과와 연결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관조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점이 있다.
부처의 사상을 내가 단편적으로 이해한 바는 이러하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디.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나는 내가 누구와 만나고 무엇을 보고 먹고 읽고 경험하는지, 어떤 미디어 환경에 노출되는지, 사회와 타인의 어떤 욕망과 마주하는지에 따라 달리 형성된다. 일시적으로 구성된다. 초등학생의 나와 대학생의 나, 지금의 나의 연속성과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본질이 무엇일까를 묻기보다는 내가 어떤 관계의 망 안에 위치하고 있는지, 그것이 내가 이전 관계의 망에서 형성해온 특성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지금의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반사적인 반응을 하는 것은 이러한 연결의 장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 또한 지나가고 변화할 것이다. 지금 내가 소유한 물건, 만나는 사람들, 품고 있는 꿈과 욕망들은 나에게 소중하고 나를 살아가도록 돕는다. 이들은 나를 움직이도록 하고 그리하여 오늘의 나는 온갖 다채로운 감각을 경험하지만 이 또한 계속해서 다음 국면으로 이동할 것이다. 하는 식으로 나도, 타인도, 어떤 사건도, 사회도 바라보기. 그 태도를 바탕으로 매일매일은 정갈하고 성실하고 호기심 어린 가벼운 생활을 하기.
좀 더 먼 거리에 스스로를 위치시켜 관조적인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나를 구속하는 관념과 기대와 습관으로부터 해방에 이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이러하다, 라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서 더 명랑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연히 읽게 된 이장욱의 소설에서 부처와 비슷한 결의 관조적인 태도의 인물들을 만났다. 이 세속세계를 부처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 것인가? 이장욱의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준다.
다음 글에서 계속…
이미지: 시오타 치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