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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May 30. 2024

하던 것을 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불교적 수행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


지난 두 글에서 요가 수행과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장욱의 소설 <침잠> (혹은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을 연기론과 무아론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대안적인 방식으로 삶을 운용하는 인물들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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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적 세계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변화하며 나 조차도 그 관계망 속에서 구성되고 변모한다. 이를 이해하고 집착을 내려놓고 그저 바라보기, 정갈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기. 부처의 사상을 이렇게 평이하게 요약해 본다. 그런데 부처와 비슷한 결의 관조적인 태도의 인물들을 이장욱의 소설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에서 만났다.


이 소설은 두 커플, 네 인물의 현재와 과거, 관계를 병치하며 그 삶들의 얽힘과 닮음을 펼쳐낸다. 연과 천이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서술되는데, 연은 남편 모수와의 사별을, 천은 동거인이자 애인 한나와의 이별을 최근에 겪었다. 연이 운영하는 해변여관에 천이 장기 숙박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씨줄과 날줄로 인과가 복잡하게 얽혀있고 연기의 그물 한 지점에서 출발해 사방으로 확산하듯이, 소설은 네 인물의 삶의 한 지점에서 때로는 이를 미시적이고 자세하게, 때로는 거시적이고 요약적으로 그 단면과 얽힘을 풀어낸다.


서점 점원이었던 연은 서점 매니저와의 이혼 이후 모수를 만나 결혼한다. 철학도였고 도지사의 전직 수행원이자 비서였던 모수은 비리 고발과 관련해 내부자 정부 유출로 얽혀 해고되고 택시 기사로 일을 하다 사고를 내 그만 둔 후 바닷가로 와서 여관을 운영한다. 연극배우인 천은 아나운서 한나가 간암에 걸린 전 남자친구를 간병하겠다고 자신을 떠나자 얼마 뒤 바닷가 마을로 내려와 여관에 묶는다.



무아의 삶


이 네 인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두 삶을 그저 수용하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한나는 끔찍한 재난을 보도하는 뉴스 방송에서 자기 신체에 무언가 감염된 양 터져 나왔던 웃음 때문에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해고된다. 이에 대한 한나의 반응을 소설은 이렇게 서술한다.


“자신의 삶이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한나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이 아닌 것이 튀어나오는 일, 그런 일이 어째서 자꾸 일어나는지 의아해하지 않았다. 한나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그건 한나의 삶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한나는 점점 더 단순한 사람이 되어갔다.”


한나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분노하거나 불평하며 집착하거나 억지로 그 원인과 결과를 추적해 해석하며 해결하려 들지 않고, 이를 그저 어떤 발생으로 받아들인다. 삶을 수용하고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 이는 한나의 방어기제이자 한나를 살아가게 하는 방식이었다.


자신의 자아, 동일성, 정체성, 욕망, 이해관계를 적극적, 진취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이 사회의 ‘정상’ 주체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이들은 어떤 발생과 수용의 교점으로서 존재하며, 물질과 힘들이 지나감에 따라 흔들리고 변화하는 한 유동적인 구성체로서 살아가는 듯 하다. 망망대해 속의 쪽배이자 파도 같은 것. 이런 점에서 이들은 부처의 ‘무아’를 살아내고 있다.


네 인물은 자아를 주장하지 않고 삶의 시간들이 ‘나’라는 물질적 구성을 그저 통과해가게 두는 태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지만, 연극배우인 천에게 이는 자아의 공백으로 나타난다.


천은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자아에 침투되고 사로잡히는데, 예컨대

“슬픔에 빠진 인물을 연기할 때는 정말 우울증을 앓았으며, 광적인 인물을 맡았을 때는 무대 밖에서조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명랑하고 낙천적인 인물을 연기할 떄는 극장 밖에서조차 조증 상태로 보였다.”

천은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며 자아를 확립해나가기보다는 그저 누군가로서 살아가고, 그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지만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몰입하는 인물에 맞추어 자아의 구성과 배치를 계속해서 바꾸는 것이다.


모수 또한 다른 방식으로 자아의 공백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해변여관을 관리하는 반복적인 나날을 보내며 그는 매일 일기를 쓰는데, 일기란 흔히 “기록하는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모수의 일기는 다르다. 그의 일기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풀어내는 글쓰기라기보다는 온도계나 풍량계의 객관을 지향하는 사실적인 기록이다. “파도의 빛깔은 어제에 비해 조금 갈색으로 변함. 바람의 방향이 바뀜. 5도쯤. 하늘의 구름이 많은 날. 방향은 북서쪽.” 같은 식으로 말이다. 해석과 주관의 없음을 지향하는 글쓰기, 무아적인 글쓰기가 모수가 생의 시간동안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행위이다.  


이렇듯 파도처럼 밀려오는 삶의 사건들이 부조리하거나 다소 불가해하더라도 인물들을 이를 그저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혹자는 '수동적'이며 '무기력'하다고도 할 수 있는 태도이다. 부처식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모든 것이 연하여 얽혀 있고 이루어져있음을 그저 인정하고, 이해득실이나 자아, 자존심을 주장하며 집착하기보다는 그저 살아간다.



명상적 태도


그렇다면 이 인물들이 한 생 동안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수용적이고 수동적이기에 무기력하고 공허한 것일까? 이 소설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그러한 듯하다. 대표적으로 장석주 시인은 이 소설 속 자아와 욕망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해 “삶에의 의지를 철회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허무주의”적인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생을 방기한 자”들이고 “공허함의 향연”이며 이 소설은 “의미를 지운 자리”에 남은 “공허와 무의미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이 하는 것이 있다. 모수의 글쓰기, 그리고 모수의 일기를 따라 시작한 연의 말하기가 그러하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연의 마지막 대사는 소설의 첫 대목과 조응하며, 이 소설 자체가 연이 천에게 들려준 긴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망망대해라는 건 무엇일까요.”

연은 천에게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은 마치 자기가 말을 하듯이, 연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수와 연이 능동적으로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재술, 재현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연결관계, 삶의 일어남, 변화, 흐름을 관찰하고 관조하는 행위이다. 이들의 기록과 발화 속에서 존재들은 뭉치고 흩어지며 생성하고 소멸하고 변화한다. 이는 관조적이고 건조하게 서술된다.


이때 모수와 연의 서술 방식은 다른데, 모수의 글이 객관을 지향한다면 연의 말은 화자의 시선이 담긴 주관적 발화이다. 모수의 객관적인 진술은 삶의 진실을 신적인 시선에서 보고자 하는 진술이다. 사사로움 없는 전지의 시선을 지향하는 글쓰기이다. 그럼에도 특정한 하나의 시점만을 점유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담고 있는 글쓰기이다.


반면 연의 말하기는 진실의 한 면만을 볼 수 있고, 땅에 뿌리박혀 있는 인간적 시선의 발화이다. 아름다움과 사악함을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서, 사악함은 사악함으로서만 인지하는, 제한적인 시야 내에서 삶을 느끼는 자의 발화이다. 자신의 감정, 인식, 판단, 주관이 들어갔지만 이를 크게 주장하지는 않는, 자신을 둘러싼 삶에 대한 서술이다.


이 두 재현의 양상 모두 부처식으로 말하면 연기의 상태를 관조하는 명상적 삶의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추구하면서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표류하는 삶을 관조하고 수용하며 생의 신비와 기쁨을 느끼는 것.


"똑같은 하루는 없잖아요. 매일이 다르잖아요. 일기를 쓰면 그렇게 느끼는데."
[...]
"맞아요. 똑같은 하루가 어디 있어요. 지구가 생긴 이래 수십 억 년 동안 똑같은 하루는 단 하루도 없었겠지. 저기 창밖을 떠가는 구름 모양도 다르고 해변에 부는 바람 방향도 달랐을 테니까. 다 비슷해 보이는 파도에도 개성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수만 년 동안 이 섬에 파도가 밀려왔잖아요. 모든 파도들은 다 조금씩 다른 파도일 거잖아요. 날씨가 다르고 대기의 질이 조금씩 달랐을 거잖아요. 창밖을 봐도 그래요. 창밖의 풍경이 어제와 다르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제와 다르고."



 기록하기 위해 관찰하며 차이를 인지하게 되고 모수에게는 그것이 매일의 가치가 된다. 일기를 쓰기 위해 사는 것일지도, 관조가 삶보다도 앞서는 것일지도 모르는 모수의 삶이다.  




현대문학 2023년 1월호에 실린 이 소설은, 후에 현대문학 핀 단편선 시리즈로 출간되었는데, 제목이 <침잠>에서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로 바뀌었고, ‘중독’과 관련된 문장들이 추가되는 등 일부 내용의 수정이 있었다. 작가조차도 소설 속 인물들을 ‘허무주의’, ‘최소한의 의지’, ‘공허’와 같은 결핍을 함축하는 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의미일까?


나에게 이 인물들은 공허하다기보다는 나름의 방식으로 충만하고, 이들이 시간을 생산적으로 운용하지는 않더라도 대안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간다고 비추어진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대해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당사자의 느껴진 감각이 달라질 테니까. 이 인물들도 자신의 인생을 불교적 수행의 삶에 위치시키고 있을까? 이 인물들을 넘어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수행의 태도로 하루에 임하며 자신의 영적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고 확장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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