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도그림 Oct 10. 2016

향기, 그, 그 아이

언제부터 내 뒷면에 배었는지

 창문을 연다. 방충망에 이마를 기대고 섰다. 문득, 그가 곧 지나가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과 건물 새로 그의 머리가 빼꼼 나타날 것이다. 기다린다. 그가 오지 않는다. 내가 잠깐 거울을 본 사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사이, 창문을 열고 멍하게 있던 사이, 그가 이미 지나갔을까. 하는데 검은 후드티에 가방을 맨 그가 무심히 지나간다. 혹시 그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을까 해서 창문을 끌어당겨 머리를 감춘다. 하지만 그는 처음 만날 때의 눈빛처럼, 낯설고 외롭게 만들어버리는 표정처럼 그렇게 걸어가 버린다. 


 서랍에서 향초를 꺼낸다. 코가 아린다. 뚜껑을 열어서 푸른 숲의 파란 향기를 마신다. 매장에서 온갖 향수를 시도해보았을 때마냥, 지나친 감각에 코가 헐어버린 것 같아, 라며 아무 생각 없이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까맣게 솟은 심지가 불을 받들지 못하고 불씨는 곧 회색 연기가 되어 오른다. 한번 더 불을 붙여본다. 심지가 바스러질 것 같다. 불을 끄고 다른 향초를 꺼냈다. 블랙베리의 향기이다. 모닥불 소리를 흉내내며 자잘자잘 탄다. 문득 그 아이가 떠오른다. 홀로 남겨진 방에 웅크리고 앉아서 손가락 사이로 고양이 털을 쓰다듬을 모습, 초를 피우고 향기를 응시할 그 아이의 모습, 부엌에서 들려오는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생채기가 커져버린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온갖 잡음에 눈을 찡그릴 그 아이의 모습. 혹은 나의 모습. 유독 긴 감각의 촉수를 느낄 때, 그는 왜 무심했는지, 그는 나를 좋아할지, 그는 왜 내 책장의 책들에, 방에 걸린 그림에, 향기의 농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지, 나는 왜 민감한지, 섬세한지, 여린지, 약한지. 생각하다보면 그 아이가 쿨하고 스타일리시하게 입고서 웃고 있다, 혹은 어둔 방에서 스케치북에 오일파스텔을 짓이기며 비명하는 형광색 눈을 하고 있다. 


 입술에 번져있는 무게를 느낀다. 입천장에 남아있는 시간을 느낀다. 몇 분 전에는 그의 존재가 채우고 있던 공간을 하얀 형광등 빛이, 침묵을 깔아뭉게는 시끄러운 음악처럼 매정하게 밝힌다. 절정에서 빗겨날 때 글을 쓴다. 예찬하거나 달래기 위해서, 불충분함을 메꾸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좋았을까, 나는 그가 좋은가. 쉽게 슬퍼지는 울퉁불퉁한 마음의 돌기에 꼭 맞는 사람은 없을텐데. 내일의 나는, 모레의 나는,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어떤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들려줄까. 그 아이는 내가 신선한다고 했다. 나는 그 아이의 짜증에 침묵했었고, '탈선'을 포장해주었다. 나에겐 아무렴 어떤 것이었고 인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아이를 동경해왔고 욕망해왔기 때문에. 나도 변했고 그 아이도 변했다. 나는 이제 신선함을 욕망하게 될까? 그의 거침없는 걸음과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 공기중에 무용한 언어를 뱉어내며 시간을 횡단하는 능력이 그때의 나처럼 신선한 것인가? 피곤한 눈을 감고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 그, 함께있는 순간을 끝맺고 다시 낯설게 돌아가는 그, 내 요구를 들어주고 몸짓과 소리에 반응하는 그,는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나에게 닿고는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는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촛불은 이미 꺼졌는데 향은 더 진하게 맴돈다. 향초를 다시 서랍 속으로 넣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긴장했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