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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Dec 14. 2016

계절 소묘

날씨에 대한 기록

지난 2년동안 써온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날씨에 대한 묘사가 꽤 많았다. 그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계절 별로 모아본다.




1. 봄


 날씨가 매우 추웠다. 꽃샘추위라고 하기에는 따듯함이 한번도 온적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이름이 어울리는 온도의 날이었다. 코트 틈으로, 옷 소매틈으로 바람이 아리게 불어들어와 몸이 차가워졌고 밖에서 이리저리 걷다보면 어느새 이빨이 덜덜덜 부딪혔다. 옷차림이 얇든 두껍든 모두가 두말없이 '춥다'고 탄식했다.


 코로 들이쉰 바람은 산의 상처 틈에서 새어나오는 차고 차분한 기운 같았다. 빛이 드는 곳엔 햇살은 봄인데 바람은 계절이 바뀌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2. 여름


 바람이 서늘해지는 여름의 끝이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다. 귀를 타고 들어와 머리를 빵빵하게 채웠다. 쌩- 쌩- 마치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 소리뿐인 것 같이. 그리고 나서는 옆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덧씌워졌다. 나는 점점 작아졌고 차 소리와 유행가 소리가 거대한 팔을 들고 나를 덮치고 있었다. 눈은 앞을 보고 있었지만 세상에는 질서가 없었다. 저것은 차고 저것은 사람이고 저것은 표지판이겠지만 그것들은 그저 빛인 듯 했고, 색깔인 듯 했고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파오고 가슴이 턱 막혔다. 감각은 과도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뇌는 이 모든 감각에 정신없이 손을 뻗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했다. 모든 것이 조각나 버렸다.



이두식 作





3. 가을


저녁의 지나침

열기를 지워내는 가을
어스름 속에서
오늘의 부재를 손가락으로 가늠해봅니다
흐르게 둔 새로 바람이 응얼처럼 고여 있습니다

잎을 잃고도 초연할까요
저무는 시절의 꽃들은 어떻게 맑을까요
겹겹이 빈 속은 잠가
사물처럼 가을 공기 중에 내가 있습니다
낙엽은 바스락거리는데 슬픔의 침묵은 무게가 없습니다



 


 



4. 겨울




셔틀버스의 창가에 앉아 버스의 흔들림을 따라 끔뻑이던 마음이 꾸벅, 잠에 들었다. 오래 간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이럴수가, 지하철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나뭇가지 위에 가지보다 두배는 두꺼운 새하얀 눈이 두텁게 쌓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은 재즈 앨범 표지에 나올 법한 흰 겨울 풍경속 우뚝 선 겨울 나무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우산을 썼다. 학교에 겨울이 왔구나. 찍어야겠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쌓인 눈이 발산하는 '겨울이야!' 를 포착하기 위해 구도를 잡았다. 여기 저기서 핸드폰을 풍경에 들이대는 모습이 보였다. 찰칵. 이제 갤러리에 들어선 겨울 풍경. 그리고 발걸음을 뗐다. 신발 앞창에 하얗게 묻었던 눈이 녹아 신발은 축축해졌고, 발은 시려왔다. 바지에 붙었던 눈도 은근히 찬 물로 배어서 다리를 눅눅한 추위로 감싸는 것 같았다. 풍경은 아름답지만, 눈은 내리쳤다. 가방에도 옷에도 눈발이 달라 붙었다. 아름다운 풍경, 질퍽이는 발걸음, 축축한 신발.  자연이 계절을 갈아입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즐기기에는 우리는 너무 약했고, 쉽게 불쾌해했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모든 '찰칵'에는 들리지 않는 질퍽거림이 숨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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