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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Aug 01. 2017

지하철과 뱃살

저 아줌마의 뱃살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지하철에 앉았는데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 세 명이 내 앞에 섰다. 셋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어유, 이거 개 옷장에서 꺼내왔어. 개가 뭘 모으는 걸 또 좋아하는데..."

"아유 이건 산지 20년 됬는데 또 안 버리고 있으니까 또 내가 꺼내 입었지..."

 지하철에 탄 저 나이대의 아줌마 3명이라면 사람들의 눈총을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셋의 대화는 조용조용했고 거기에는 '소녀'스러운 맞장구가 있었다.

 자리가 났는데 아줌마들은 서로 사양을 하다가 자리를 뺏기게 생겼다. "에, 나 금방 또 내리는데..." 하던 한 분이 나머지 둘의 부추김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그 중 한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자주색 철테 안경을 쓰고 살집도 화장끼도 없이 누리끼리한 얼굴을 한 아주머니다. 그리고 개구리처럼 배가 나왔다. 아줌마의 배를 바라본다. 저 아줌마는 무엇을 먹고 저 배를 가지게 되었을까? 먹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의 뱃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집에 가면 뭘 할까?


 존 스타인백 같은 작가라면 "그는..." 하고 시작해서 "이 정도면 그의 공적인 생활에 대한 설명이 충분할 것이다. 그의 사생활은...." 하며 몇 페이지를 한 인물의 일대기로 술술 채워 나갈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저 아줌마가 지금 무엇을 하는 사람일지, 내 나이인 스물두 살에는 무엇을 했을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역사 지식을 동원해보자면 젊을 때 공순이 같은 일을 했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바로 시집을 갔었을까? 아니면 혹시, 저 아줌마는 예뻤을까? 다소 주눅이 들어 있고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는 아이었을까?

이선민 <여자의 집 1 현우네> 2000


 나는 사람들에게서 오늘, 지금의 모습만을 본다. 세계가 종이인형처럼 나풀거리며 지나간다. 그러니까 내가 보는 것은 헛것이거나 환상일 뿐이다. 사람들을 입체로 빚어낼 수 있다면, 전동문에 기대 전화통화를 하는 누군가에게서, 노약좌석에 앉아있는 안경 쓴 할아버지에게서, 아주머니의 뱃살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면, 혹은 그럴싸하게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마주침은 만남이 되고, 이들의 몸과 표정과 자세는 퇴적된 시간의 증거물이 될텐데. 그렇다면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얼마나 재미있으리! 생기를 불어넣고 사실성을 더해가며 머릿속에서 사람들을 주물주물 빚는 일이 될 테니까.


이선민 <여자의 집 2 김부남의 집 #2-추석풍경> 2004





표지사진: 이선민 <여자의 집 2 안명규의 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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