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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Dec 27. 2016

미로의 출구는 어디인가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살인 기계 탈출기  

 사람을 죽이도록 설계된 방에 여섯 사람을 가둔다면 어떻게 될까? <큐브>는 이런 간단한 설정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수학적인’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건이 벌어지는 큐브라는 공간이 수학적 원리에 입각해 작동하는 살인 기계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그 속에 던져진 인간 군상들 또한 인간의 특정 면모를 각각의 인물로 치환해 놓은 듯한 도식적인 알레고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영화에 나타나는 색채, 인물의 배치, 소품 등이 특정 의미를 담지하는 시각적 상징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표면적인 서스펜스뿐 아니라 한 층 아래에서 각각의 장면과 대사들이 함축하는 의미를 읽어내야 <큐브>의 정수를 즐길 수 있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미로 탈출 모티브를 이용하고 있다. 미로 탈출 모티브에서는 비단 탈출, 즉 피하여 달아나는 것만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자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현실을 발견한다는 점도 중요한 면을 이룬다. <큐브>에서도 인물들은 큐브의 비밀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풀어나가며 출구를 찾아 전진한다. ‘탈출’이라는 명확한 목표 하에 주어진 힌트로 가설을 세우고 여러 큐브들을 이동하며 출구를 찾는 것, 이것이 사건 전개의 동력이다. 한편 이 동적 전개 속에는 인간 간 갈등과 대립,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여러 가치들이 어떻게 충돌하고 조화하는지를 이를 특징적으로 대변하는 사람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면서 <큐브>는 탈출 시도 과정에서 인물들이 갖게 된 새로운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관객들이 인간과 세상을 보는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우선 큐브란 어떤 공간인지, 각각의 인물들과 이들의 관계는 무엇을 함축하는지, 끝내 자폐아 카잔만이 탈출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중심으로 영화를 해석해 볼 것이다. 또 조명, 음악, 인물의 배치가 어떻게 영화의 내용과 조응하는지 형식적 측면에 대한 분석도 시도할 것이다. 이후 이 영화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어떠한 진리주장을 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영화를 종합적으로 비판, 평가해볼 것이다.  







큐브란 무엇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왜 여기 갖혔는가.’ 영화 초반 인물들에게는 큐브라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인물들은 큐브에 대해 각기 다른 추론을 한다. 홀로웨이는 이것이 정보, 군대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쿠엔틴은 싸이코 갑부의 유흥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건축가 워스를 통해 드러나는 큐브의 실상은 배후자의 음모나 장난이 아닌, 이 세계의 축소판이다. 개개인이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고 행하는 목적합리적인 행위들이 무덤과 같은 이 사회를 만들어내며, 큐브는 그러한 통제 불가능한 사회 속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개인들이 판 공동무덤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큐브는 실존적 상황에 대한 은유이다. 그리고 영화는 워스의 대사를 빌려 실존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You think we matter? We don't. You're not getting out of here! There is no way out of here!” 이 세상은 마치 진리 진실, 행복에 도달해 삶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지만, 실제로 출구는 없다는 것이다.  

 인물들이 큐브를 받아들이는 각기 다른 방식은 곧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나타낸다. 홀로웨이는 기독교적이고 목적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큐브에 ‘왜’ 갇혔는지, 곧 우리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염두하며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We have to ask the big question. What does it want, what is it thinking?” 한편, 쿠엔틴은 의미를 묻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 하라고 말하며 가치와 의미가 배제된 현대사회의 전형적인 목적합리성을 보여준다. “Keep your head down, keep it simple, look at what’s in front of you.” 반대로 워스는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이다. 그는 세계는 어쩌다 우리가 던져진 곳이자, 우리에게 아무런 존재의 목적도 부여하지 않는 곳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큐브>는 점차 워스의 입장에 무게를 실어주는 듯히다.  




 자신들이 어떻게 큐브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논의하던 인물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다음 방으로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인물들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행동하지 않음’으로 대응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힌트들을 찾아내 이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고자 한다. 이들은 살겠다는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의지만으로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이 미로로부터의 탈출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하지만 강력한 희망을 품고 말이다. 하지만 살인장치들을 통과하고 홀로웨이를 잃으면서까지 그들이 결국 도달한 곳은 허탈하게도 그들이 시작했던 곳이다. “This is the room we started in. I was right. We should never have moved in the first place.” 그들은 왜 움직였던 것일까? 탈옥수 렌이 얼굴이 탄 채 죽어있는 방으로 다시 돌아온 그들, 큐브에 갇힐 때 깨졌던 안경 조각이 있던 첫 방으로 다시 돌아온 그들은 무의미한 쳇바퀴를 자발적으로 돈 것에 불과했을까? <큐브>는 여기서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원점으로 돌아온 이들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계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자기 자신과 인간에 대한 시선도 한 층 깊어졌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노력의 결과 자폐아 카잔이 큐브 밖으로 걸음을 디딘다.  









알레고리 읽기: 인물


 큐브 속 인물들 각각의 특성과 이들간 갈등과 상호작용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축소판이다. 인물 각각을 하나의 알레고리로서, 이들간의 갈등을 이들이 대변하는 특성간의 충돌로 읽어볼 수 있다. 쿠엔틴은 경찰이다. 그는 질서, 권력, 폭력을 대변한다. 그는 전체 그룹을 통솔하고 질서를 유지하고자 인물들에게 일정 기능을 배당한다. 하지만 질서는 언제나 폭력의 독점에서 온다는 것을 생각할 때 형성된 질서 이면에는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권력과 그 기반이 되는 폭력이 있다. 한편 홀로웨이는 이상주의, 인간성이라는 특성과 기독교적인 목적론적 사고를 대변한다. 무료 진료사라는 점에서, 카잔을 보살핀다는 점에서 그녀를 휴머니스트라고 명명해볼 수 있다. 그리고 홀로웨이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어떤 상위주체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이는 음모론적인 사고로 이어진다.

 한편 레븐은 과학을 대표한다. 레븐은 뛰어난 수학적 능력을 가지고 큐브의 작동원리, 즉 큐브의 살인 기계들이 소수와 제곱수의 원칙에 입각해 배치되어 있음을 밝혀낸다. 그녀의 안경은 인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큐브에 떨어지자마자 한쪽이 깨져버린 안경은 인간에게 결국 완전한 인식과 진리에의 도달은 불가능함을 시사하기도 한다. 워스의 경우는 그 이름대로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부터 그는 무기력한 태도를 보인다. 삶에는 의미가 없고, 우리는 우리의 무덤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그의 관점은 신과 모든 절대적인 가치가 부정된 근대적 니힐리즘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런 인물 군상간의 상호관계는 실제 세계에서 이 특성들이 어떻게 조화하고 충돌하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홀로웨이와 워스의 대립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근대적 세계관의 대립이다. 이 둘은 큐브의 의미와 나아가서는 삶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서 대립한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에게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던 홀로웨이는 근대적 니힐리스트인 워스와 언쟁 끝에 ‘눈을 뜬다’. “. You opened my eyes Worth./ you’re such a Helen.” 홀로웨이가 기독교적 중세인에서 근대인으로 계몽된 것이다.

 한편 쿠엔틴과 홀로웨이의 대립은 쿠엔틴이 대변하는 폭력성과 동물성, 적자생존의 원리, 잔인한 능력주의와 홀로웨이가 대표하는 인간성, 휴머니즘의 충돌을 보여준다. 음향감지를 통해 작동하는 살인기계가 있는 방을 통과하는 장면에서 쿠엔틴과 홀로웨이는 카잔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대립한다. 쿠엔틴은 카잔을 놔두고 갔다고 이후 다시 데리러 오자고 주장하지만, 홀로웨이는 그것은 거짓말일 뿐이라고 쿠엔틴을 비판한다. “Shame on you. Will you look at yourselves. What have you turned into? They may have taken our lives away, but we are still human beings. That's all we've got left.” 쿠엔틴이 마초적 남성으로, 홀로웨이가 ‘암컷으로는 무능력한’ 성적인 매력이 없는 여성으로 표현되며 서로를 멸시하고 비판하는 것도 이 대립을 극화하기 위한 설정이다. 이 대립은 홀로웨이의 죽음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 장면을 통해 <큐브>는 폭력성과 인간성의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음식과 수면 같은 기본적 욕구조차도 결핍된 한계적 순간에 인간성은 폭력의 자비에 그 생존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시선, 도덕, 규범의 제약이 사라지고 오로지 인간다움을 실현할 것이냐 말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에만 내맡겨졌을 때 폭력과 동물성은 약자에 대한 배려, 사랑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을 버린다. 쿠엔틴의 두 손에만 의지하게 된 홀로웨이가 결국 악의 가득한 쿠엔틴의 표정을 마주하고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장면은 폭력에 의해 짓밟힌 인간다움을 형상화한다.

 한편으로는 쿠엔틴과 레븐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계속 변화한다. 영화 초반에 쿠엔틴과 레븐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다. 레븐은 쿠엔틴이 벗은 잠바를 들어주고, 쿠엔틴은 큐브 밖에 나가면 저녁을 해주겠다는 레븐의 말을 데이트 신청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쿠엔틴의 폭력적인 면모가 드러날수록 레븐은 쿠엔틴을 멀리하게 된다. 이 둘의 관계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나타내며 능력주의적 태도가 세계의 진실을 알려준다고 여겨지는 학문을 대하는 방식을 암시한다.

 이렇듯 영화는 인물들 간의 상호 관계를 드러내며 전개된다. 그리고 절정에 치달을 수록 점점 격화되는 쿠엔틴의 폭력성은 결국 비합리적인 폭력 그 자체가 된다. 탈출구를 눈 앞에 둔 방에서 쿠엔틴은 문 손잡이로 레븐과 워스를 찌른다. 그리고 탈출하려는 쿠엔틴을 워스는 필사적으로 막는다. 결국 큐브는 이동하고, 쿠엔틴의 피가 벽을 적신다. 워스와 레븐은 방에 남아 쓰러진다.   








카잔이 탈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누가 탈출할까’라는 질문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방까지 살아서 온 네 사람 중 셋이 서로를 죽이고, 자폐아 카잔만이 밝은 빛을 마주하며 터널을 걸어나갈 때 이 질문은 다른 의문으로 바뀐다. ‘왜 하필 카잔인가?’ <큐브>에서 카잔의 역할은 별로 없다. 영화 중반에 어떤 방에 혼자 있는 카잔을 그룹이 발견했고, 이후 홀로웨이가 카잔을 보호하며 이 집단은 함께 전진해나간다. “Trap!”, “This room is green.”같은 짧고 유아적인 언어를 구사하던 카잔은 영화 후반에서 제곱수를 판별하는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지고 이후 그룹이 안전한 방을 찾는데 공헌을 한다. 그런 카잔만 살아남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큐브>는 이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살겠다는 의지와 탈출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주어진 환경을 헤쳐나간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룩했으며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카잔에게도 인간의 특정 측면을 대변하는 대표성을 부여해본다면, 이는 ‘순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카잔은 언어가 틀 지우는 인식체계에 포섭되지 않았으며 그 한계에 국한되지 않은 존재이다. 대신 큐브라는 공간의 작동원리, 곧 이 영화가 세계의 근본적 원리라고 주장하는 수학적 질서와 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우주의 원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또 ‘순수’하기에 혼자 사회적 세계를 헤쳐나가는데는 무능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순수란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무엇일까? 영화는 인간이 내던져진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어떠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는 몇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우선 현실을 초월한 듯한 하얗고 깨끗한 빛 속으로 걸어나가는 카잔의 모습에서 순수란 내면을 도야해서 자아를 버리고 존재의 본질로 다가서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구원일 수 있겠다고 연상할 수 있다. 한편 큐브가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생존만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삭막한 세계라면 그 밖에 있다고 추정되는 인간 사회는 여전히 폭력과 부조리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사랑과 아름다움도 존재하는 보다 나은 세계이다.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카잔은 마치 새로운 생명이자 후대를 상징하는 것 같고, 결국 영화는 환경과의 투쟁을 통한 역사의 발전을 주장한다고 독해할 수도 있다. 또는 이때의 순수를 이데올로기적 발언을 최소화한 형식적인 조화와 균형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시, 음악, 형식주의 미술이라 볼 수도 있다. 인간과 사회를 배제하고 형식미의 이데아를 구현하는 것이 인간이 오염된 세상 속에서 창출할 수 있는 지고의 가치라는 주장으로 영화가 읽힐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순수는 나약하다. 카잔은 홀로웨이를 비롯한 그룹의 도움이 없었다면 혼자 큐브를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카잔이 이행한 세계는 여전히 폭력적이고 잔혹하다. 큐브라는 폐쇄회로를 벗어나 도달하는 곳은 또 다른 폐쇄회로인 것이다. 더 크고, 더 복잡하고 보다 다양한 여지가 있지만 그 본질은 큐브와 다르지 않은 세계이다. 진정한 자신을 만나고 영적 체험을 한 종교인조차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삶을 여전히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 역사가 발전해도 완벽한 유토피아는 구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순수 예술의 미적 가치와는 별개로 이 세상은 여전히 그러한 순수함이 위협받는 곳임을 시사한다. 동굴에서 나오는 최초의 사람처럼 빛을 향해 나아가며 기지개를 펴는 카잔의 뒷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까.      










영화의 형식: 조명, 음악, 미장셴


 인간의 실존에 대한 상징적 묘사와 최고 가치로서의 순수에 대한 진리 주장은 서스펜스를 쌓아가며 잘 짜여진 내러티브를 통해 일관되게 드러난다. 또한 영화의 형식적 측면과도 조응한다. <큐브>는 1997년에 35만 캐나다 달러로 제작된 저예산 영화로, 1개의 큐브 방에서 6명의 배우만으로 만들어졌다. 화려한 스펙터클이나 특수 효과는 없지만 이 영화는 연극 무대처럼 최소한의 장치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미적 형식을 창출해냈다. 조명, 음악, 인물의 배치를 통한 미장셴과 카메라 기법이 모든 쇼트마다 치밀하게 계산되어있다.

 <큐브>에서 색깔은 단순히 방과 방을 구분하는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면서 장면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특히 특징적인 것은 빨간색과 흰색의 대립이다. 빨강은 극적인 대립이 있는 장면에서 이용된다. 쿠엔틴의 권력지향적 태도와 워스의 허무주의적 태도가 서로 대립할 때, 큐브의 의미에 대해 논쟁할 때 방은 빨간색이었다. 그리고 탈출구를 앞둔 마지막 방 또한 빨간색이었다. 출구를 열자 흰 빛이 비추어 들어왔지만 쿠엔틴이 레븐을 찌르면서 문은 닫히고 다시 붉은 조명이 모두를 붉게 비춘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때 흰 옷에 붉은 피가 낭자한다. 흰색과 붉은 색의 극명한 색채 대비를 통해 순수의 순수함과 폭력의 폭력성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영화의 음악 또한 독특하다. 영화감독이자 음악감독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린치가 이 영화의 음악을 연출했다. “우리는 각종 특이한 소리를 이 큐브 세계에 집어넣었어요. 그것들은 종종 혼성적인 소리였어요. 티베트 승려들이 독송하는 소리가 새소리, 코끼리 소리와 섞인 식으로요. 이들을 다 혼합시키면 인상적인 소리가 나오지요.”<큐브>는 기성 음악을 사용하거나 멜로디가 있는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음향을 표현주의적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인물들이 큐브 방들을 건너는 장면과 잠을 자는 장면에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음악은 성적으로 불온하게 들리기도 하고, 듣는 이를 불안하고 흥분하게 만든다. 이는 의미를 담고 있는 대사와 행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황에서도 오히려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특히 이 음악은 쇼트들의 빠른 몽타주 장면과 함께 나오면서, 또 잠을 자는 장면에서 인물들이 꾸는 꿈이라고 여겨지는 모호한 형상들과 병치되면서 관객의 불안을 고조시킨다.  




 또한 이 영화는 예술적인 미장셴으로 꼼꼼하게 장면을 구성했다. 특히 롱 쇼트에서 인물들의 배치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은 잔인하고 삭막한 큐브의 출구를 발견하는 순간을 찍은 부분이다.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소망을 그린 이 미장셴은 <큐브>의 백미를 장식한다. 학문이 비밀을 풀면 가치가 출구를 가리키고 순수가 그 문을 연다. 과학적 탐구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은 사실판단의 영역이다. 이것은 방향이나 당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가치가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그리고 그 문을 우리의 순수한 영혼이든 다음 세대이든, 순수가 여는 것이다. 이때 세상은 붉고 폭력적이지만 인물들은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이렇듯 <큐브>는 색채, 음악, 미장셴을 통해 내용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했다.








<큐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큐브>는 쿠엔틴의 대사 “Keep your head down, keep it simple, look at what’s in front of you” 처럼 눈 앞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만 급급한 사람들에게 고개를 들고 우리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괴물을 보라고 말한다. 포장과 허위를 제거한 실존의 본질은 큐브에서의 생존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살 뿐이며, 가치 있는 어떤 것도 근본적으로 인간과 사회를 구원해주지 못한다고 이 영화는 비관한다. 실존은 실로 그러한 듯 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탄탄한 스토리와 알레고리적인 대사와 동작들 그리고 음악, 색채 등의 형식적 요소를 내용과 조응시키는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앞서 ‘수학적인’ 영화라고 언급했듯이 <큐브>는 한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세상은 수학적 법칙으로 이루어져있고,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참된 방법은 수학적 방법론, 또 이를 활용한 과학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탈출한 카잔 또한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수적 직관으로 우주의 원리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이러한 전제를 확인해준다. 그리고 이는 수학, 과학적 방법론에 앞서 있는 서구적 사유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과연 수학이 가장 참된 인식의 수단인가?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로부터 탈출을 꾀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적은 예산과 소규모의 인원으로 방 한 칸에서 이러한 작품이 가능했다는 점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대사와 대사들이 퍼즐처럼 전체 내러티브에 적확하게 부합한다는 점과 화면의 구성과 색채, 카메라 기법과 미장셴 모두 뛰어나게 쓰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 무엇보다 서스펜스와 의미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기에 <큐브>를 수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참고문헌

영화: 빈센조 나탈리, <큐브 Cube>, 캐나다, 1997.

고원, <신화, 소설 그리고 영화-큐브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중심으로>, ⟪문학과영상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1999.

이재선, 〈탈출과 방랑의 모티브〉,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17호⟫, 2002.

Dov Kornits, "Director, Vincenzo Natali - Cube", 1998.05.08., <http://www.hollywoodbitchslap.com/feature.php?feature=17&printer=1>, 2016.12.22.

Wikepedia, "Cube(film)",  2016.01.31., <https://en.wikipedia.org/wiki/Cube_(film)>,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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