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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Feb 09. 2017

[03] 예술이 슬픔을 치유해준다고?

알랭 드 보통에게 묻다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거지?"


 예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지난 번에는 필자의 개인적인 그림 감상 노하우와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스토리텔링 감상법에 대해 소개했다. 이번에는 초점을 좀 바꾸어서, 그림을 보다가, 소설을 읽다가, 음악을 듣다가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음직한 질문을 중심으로 작품 감상 방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게 다 무슨 쓸모가 있는거지?"
"그림은 왜 보는거야?" "소설은 왜 읽는거야?"
"예술 뭐 다 좋은데, 이게 내 삶이랑 무슨 상관인데?"



 다들 한번쯤 이런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지 않는가? 정말 예술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걸까? 일단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과 이후 몇 차례의 기사에서는 '예술이 어떻게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내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예술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을 참고해 볼까? 알랭 드 보통과 존 암스트롱은 공저 <영혼의 미술관>에서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어?' 하는 물음에 대해 몇 가지 대답을 제시한다. 이 책은 예술이 우리의 심리적 결핍을 채워주고 우리를 치유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7가지로 나누어 상세하게 소개한다.  
  
이 글에서는 7가지를 간단하게 요약하고, 몇몇을 골라 구체적인 감상법으로 발전시켜 보겠다.


예술의 기능

 
1. 기억: 기억에 서툰 우리들이 그림, 글을 이용해 망각에 대항해 대상을 기억할 수 있다.
2. 희망: 고난의 현실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경관, 대상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3. 슬픔: 예술은 '슬픔이란 인간사에 원래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각하게 해 우리가 슬픔을 받아들이고 넘어서는데 도움을 준다.
4. 균형회복: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소홀히 했던 성향들을 표현한 예술을 감상하면 우리 삶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5. 자기이해: 평소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과 상황을 예술이 표현해줄 수 있다. 이를 감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예술을 매개로 자신을 타인에게 보다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6. 성장: '이질적인 것'을 표현한 예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까지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7. 감상: 예술은 평소 지나쳤던 것들에 주목하게 하며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인식하는데 도움을 준다.  


<영혼의 미술관>에서 제시하는 예술의 기능에 대한 더 상세한 요약을 원하시면  ▷▷▷ http://book.naver.com/bookdb/today_book.nhn?bid=7320648






슬픔을 이해하기


 이 기능들 중에서 '슬픔'에 초점을 맞추어 예술 작품을 본다면?

 슬픔을 위한 자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사회에서도 넓지 않다. '꿈, 목표, 희망, 미래, 성취, 업적, 부, 권력, 아름다움, 건강, 유머, 웃음, 춤, 매력.' 이런 것들만이 공적인 관계의 장에서 허용된다. 반대로 '우울, 무기력, 나약함, 슬픔, 죽음, 게으름, 뚱뚱함, 멈춤'은 지워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벗어나 밝음과 빛의 영역으로 가고자 한다.  

 이를 잘 표현한 구절이 있어 인용해본다.



    모든 해로운 것이 제거된 음식을 통해 신체와 정신을 관리하여 우리가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곳은 물론 건강과 행복이다. 건강과 행복, 그것은 소에게도 딸기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인간들에게 중요하다. 아니 그것은 우리 삶의 지상목표다. 그리하여 우리는 불행과 병을 배척한다. 아픈 신체와 병적인 정신을 기피한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에서 흘러나오는 축제적인 음악을 사랑한다. 그렇게 우리는, 낮에 취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백야에도 끝이 있다.
     삶에서 죽음을 밀어내려 할수록 그것은 더욱 파멸적인 형태로 돌아온다. 그것은 대체로 추악하고 가끔은 잊을 수 없게 아름답다. 사람들은그것을 혐오하고, 동시에 매혹당한다. 그렇게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우리를 죽음에 대한 매혹으로 인도한다. 삶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완벽한 삶에 매달리지만 그럴수록 삶에서 구역질을 느낀다. 그것을 꽉 움켜잡을수록 그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세계는, 밤과 낮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할 떄 우리는 비로소 단조로운 명도의 시계를 벗어나 채도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미래에 관해 생각할 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이르든, 그토록 바라던 혁명과 해방 후에도 밤과 낮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아니 밤과 낮이 존재하는 한에서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니 어느 한쪽을 지워버리겠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과연 우리는 그것을 원하는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고통인가? 언젠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김사과  <0이하의 날들>  p. 112-113


 예술은 이러한 '부정적인 것', '슬픔'에 그 목소리를 돌려준다. 이것이 인간에게 필연적임을 알려주고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나만 그런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며 위로해주는 것이다.  








작품 감상법


 그럼 이제 '이 작품이 내가 슬픔을 이해하고 극복하는데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라는 관점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필자의 마음에 들었던 작품 몇 개를 소개하겠다.
  

얼굴과목을닦는수건은 꽃무늬가자잘하게놓인흰색이거나 갈색줄무늬가있는흰색이다. 수건은반을접어사용하고 수건걸이에도반으로반듯하게접어건다. 그리고는 오른발과왼발을 차례대로세면대에올려 얼굴을닦은것과똑같은순서대로 닦는다. 발수건은 아무무늬도없는 초록색을쓴다. 장식못에 수건의가운데를맞춰걸고 다시비누를꺼내 거품을세번손바닥에낸후 세면대안을닦는다. 비누를흐르는물로씻은후 용기에놓는다. 화장실에서나온그는 파란색슬리퍼두짝을 나란히문턱에걸쳐놓고는불을끈다.
그는오늘도 뇌에입력된운영프로그램을 무사히끝마쳤다. 캄캄해진화장실거울속에는 그가쓰다가그대로두고나온공기가 언제나처럼뒤엉켜있다.

이원 '사이보그4' 부분


하루 일과가 끝나고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는가?   



여기에 앉아보고 저기에 앉아본다
컵에 물을 따르기도 하고 술을 따르기도 한다

누구와 있든 어디에 있든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저녁이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 마음에 드는 저녁이다

저녁에 대한 이 욕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교차로에서, 시장에서, 골목길에서, 도서관에서, 동물원에서
오래오래 서 있고 싶은 저녁이다

빛이 들어왔으면,
좀더 빛이 들어왔으면, 그러나
남아 있는 음지만이 선명해지는 저녁이다

간절한 허기를 지닌다 한들
너무 밝은 자유는 허락받지 못한 영혼들이
파닥거리며 모여드는 저녁이다

시멘트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검은 나방들,
나방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눅눅한 날개 아래 붉은 겨드랑이가 보이는 저녁이다

무언가, 아직 오지 않은 것,
덤불 속에서 낯선 열매가 익어가는 저녁이다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전문



 

Edward Hopper  <Morning Sun>


Sir John Everett Millais  <Ophelia>


우울과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때, 이 그림만큼 심연의 쾌락을 잘 그려낸 작품이 있을까?


  



다음에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이 작품이 내가 '슬픔'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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