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사실 내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기억은 단편적인 진실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냉정하게 자기분석을 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려고 하더라도 과거의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고백에는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개입되어 있다. 그러한 고백을 통해 기대하는 바가 타인의 동경이든 동정이든, 자기 혐오이든, 모종의 안락이든 간에 어떤 반응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한다.
"나는 이런 일을 겪었어요.",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해요.", "이건 내 고질적인 문제에요." 라는 모든 말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말하는 단순 과거 시제가 아니다. 현재 내 속에서 일어난것을 말하는 복합 과거도 아니다. 이것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이미 된 것으로 말하는 전미래이다. 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그것은 사실 미래에 어느 시점에서 이미 그렇게 된 나를 말하는 것이다.
'자화상', '천직(하늘이 내려준 직업)'과 같은 제목의 글을 썼었다. 내 글에 반복되는 푸른 우울, 간지러운 폭력성, 자르고 흘러내리고 눌리는 이미지가 나의 그늘인 것 같다고 썼었다. 지워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림자와 습지는 거기에 있고 그것이 글에 자꾸 나오는 것이라고 적었었다. 이런 이미지들이 내 과거이자 내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해석의 문제인 것 같다.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은 그것이 나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기 떄문이다. 내가 자꾸 같은 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나는 돌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의 습관이 회로처럼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사실 내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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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에서는 치료를 "Talking cure"라고 한다. 치료의 핵심은 대화를 통해 피분석자의 이야기를 새롭게 쓰는 것이다. 분석가와 피분석자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피분석자의 본적을 피분석자가 만들어냈던 자신의 이야기의 내부로부터, 둘이 함께 구축한 이야기의 내부로 이전한다.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이야기에 등장하는 '나’의 사실성을 점점 증대된다. 또 이 과정에서 피분석자가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것을 의식화하면서 병적인 징후를 해소한다.
-나는 무엇을 억압하고 있는 것일까? 내 몸의 이상한 징후들과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무엇 떄문인 것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거지? 그 이야기들은 어떤 결과는 낳고 있는 거지?
-난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어떤 이야기가 이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그런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나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Anne Teresa De Keersmaeker, Rosas: ROSAS DANST ROS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