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밑그림을 그리는 방법

결정적인 순간에 선택을 내리는 법

by 지도그림


ㅎ.jpg Constantin Guys



오늘은 근래 저의 마음을 무겁고 초조하게 했던 일에 대해 써보려고 해요.

“결정적인 순간에 선택을 내리는 방법” 정도로 거창한 부제를 붙여볼까요.



일주 전쯤 그늘지고 침잠한 얼굴에 움푹 패인 두 눈으로 돌아다니던 며칠을 겪었어요. 과거, 현재, 미래의 조각들을 헐겁게나마 짜 맞추어 놓고 그 위로 걷는 중이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몇몇이 흔들려 떨어지고 나머지 조각들도 자신의 위치를 잃은 거에요. 새로운 조각도, 본래 뿌리 깊었던 것도, 갑자기 운석처럼 내리꽂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바람에 날려온 살랑거림도 그냥 다 기워놓아서 엉성하기 짝이 없는 지평이었으니, 예고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저는 제가 사방으로 퍼져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조각들을 재정렬하고, 이제는 눈을 맑게 씻고 제 자신을 보아야 한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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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런 글을 구상한 적이 있었어요. 제목은 <완벽한 밑그림을 그리는 방법>. 보들레르에서 한 가닥, 밀란 쿤데라에서 한 가닥 끌고 나와 매듭지은 글이었지요.




토마시는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라고 되뇌었지만 금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래야만 할까?

그렇다, 취리히에 남아 프라하에 혼자 있는 테레자를 상상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동정심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일생동안? 한 달 동안? 딱 일주일만?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중략)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만약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하며, 제 선택들과 그 결과로써의 제 자신에게 자꾸 물음표를 붙이던 시절의 핵심 물음:

‘이 완성작 없는 무용한 밑그림은 도대체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어느 날 문득 보들레르의 글이 힌트를 주었어요. ‘밑그림’이라는 단어가 두 글을 묶는 매듭의 리본이 되었지요.




두 가지 점이 G씨의 제작에 드러난다. 하나는 부활시켜주고 상기시켜주는 기억의 집중, 다른 하나는 불꽃, 즉 거의 분노에 버금가는 연필과 붓의 도취이다. 그것은 충분히 재빨리 표현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며 종합적 양상을 찾아내어 파악하기 전에 환영이 달아나도록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을 사로잡는 무시무시한 두려움으로서, 그 예술가들로 하여금 정신의 명령이 결코 손의 머뭇거림 때문에 변질되지 않도록, 또 궁극적으로는 작품 제작, 즉 이상적 작품 제작이 저녁을 먹은 건강한 사람의 뇌에 있어서의 소화가 그러하듯이 그만큼 무의식적이 되도록, 또 그만큼 유연하게 되도록 모든 표현 수단을 습득하기를 그토록 갈망케 하는 두려움이다.

(중략)

이러한 방법은 비할나위 없는 장점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이 진행되는 어느 단계에 있어서나 개개의 데생들은 충분히 완성된 듯한 느낌을 준다. 원한다면 그것을 밑그림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만, 완벽한 밑그림이라고 불러주었으면 한다. 여기서 모든 색가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만일 그 조화를 더 높이려 한다면 색가들은 언제나 나란히 대망의 완벽함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완벽한 밑그림을 그리는 G씨의 방법대로 인생이라는 밑그림을 그린다면, 그 삶의 그림은 완벽한 밑그림이 될 거에요. 당시에 저는 이렇게 메모해 놓았습니다.





<완벽한 밑그림을 그리는 방법>


-내용의 발견: 선택은 직관적으로.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는 '이러해야 한다'. 모든 부추김에 움직이라는 것이 아니다. 여러 욕망과 선택의 기로 중 ‘이것이다’, 라고 직관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방법의 습득: 환영이 달아나기 전에 손의 머뭇거림 때문에 변질되지 않도록 실천한다. 이때 필요한 기술은 용기, 그리고 끝이라고 선언할 수 있을 때까지 밀고 나가는 자기통제력.

-완벽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그림 또한 여러 가능성들을 배제한 단 하나의 밑그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때 그리는 것은 운명이 미리 그려 놓은 어떤 한 형상에 근접하는 그림일 것이다. 운명은 직관과 감각을 통해 자신의 길을 드러내기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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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기로를 선택하고 계속 나아가는 것과 이에 대한 의심 사이에서 앞 뒤로 뒤뚱거리다 예전에 제가 구상한 이 글을 다시 읽어보았어요.

맞아요. 완벽한 밑그림은 그렇게 그리는 것이에요.

-직관, 환영이 달아나기 전의 실천, 용기, 자기 통제력.




시간의 붓을 쥐고 있어요, 저 넷 모두, 어느 하나도 강인하지 못하고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림은 그려야지요. 남는 것이 후회이든 걸작이든 피로든 일단,

다음 선을 긋습니다.







-2019년 여름에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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