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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Nov 28. 2019

오늘의 착란

이 밤이 가져다주는 순간적이고 한시적인 착란 속에, 매달리렵니다

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
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
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

진은영 –대학시절 중-





   와인을 마시고 있습니다. 얼굴의 절반 정도 붉은 취기가 올라오다가 금방 사그라들어, 저는 갈증을 달래듯 벌컥거리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오늘 읽은 좋은 문장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진짜 모르핀(les dernières tonnes de morphine vraie qui peuvent lui rester)”을, 저는 누구에게도-체면과 바름, 잇따를 글 줄기를 기다리는 저의 인물들, 내일의 약속들- 무엇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아요. 이 밤이 가져다주는 순간적이고 한시적인 착란, 옅고 소박한 흐려짐 속에서 저는 졸음과 꿈이 무거이 드리울 때까지, 매달리렵니다. 저녁에 마신 와인에 비해 이 술은 부드럽고 가볍고 달달합니다. 지금은 혀를 떫게 하는 건조하고 메마른, 땔감 같이 흐르는 액체를 원하는데 말이지요.


   오늘 미학과 논문 발표회가 있었어요. 미학자들의 멀고 고상한 언어가 오갑니다- 아르토의 문학을 통한 생산과 생식 비판, 댄 플래빈의 작업을 중심으로 본 핼 포스터와 로잘린 크라우스의 미니멀리즘 개념의 균열성, 들뢰즈의 마조히즘에 입각한 현대 장신구의 해방적 속성, 블라, 블라, 블라- 질의 응답, “푸코의 생명권력 개념이 후자에 대해서는 적용되지만 전자에서는 과연 적절한가 싶네요”, “기존에 정립된 미학 개념이 그다지 견고한 기반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 사조의 정설로 정립된 작가의 작업을 재고하며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것을,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면모로 평가하고 싶네요.”


   제 앞에 앉은 사람은 목까지 올라오는 부드러운 니트를 입었어요. 윤곽을 드러내는 검은 옷감 아래로 그의 견고하고 굽은 몸이 드러납니다. 저는 그의 앞에서 말의 탑을 쌓은 적이 있어요. 취약한 도미노 위에 올라 아래를 향해 큰 소리로 말을 하고, 하다가, 집에 오는 길에 혼자 손가락 하나로 그 탑을 무너뜨렸지요. 누군가의 물음 앞에서 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엉겅퀴 같은 언어를 조직해 탑이든 장벽이든 떠밀려 쌓고 있습니다.




 제가 새로 고양이에 정을 붙였다는 이야기는 했던가요? “나는 두려우면서도 두렵지 않은데 내가 두렵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로, 꼭 진실만은 아닌 규정을 하는 것 같아, 확인하는 순간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버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말이지.” 확인하지 않으면 고양이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둘 다 일수도 있지요. 제 안의 많은 것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밤도 낮도, 옳음도 그름도, 더러움도 청결도, 사랑도 기대도 무료함도 아닙니다. 그만, 언어로 윤곽을 그리는 일은 접어두고 선이 아닌 색으로 문지르면 안될까요? 술을 마시고 눈을 맞추고 책을 읽고 시를 끼적이다가 걷다가 뒹굴다가 소리를 지르면 안될까요?


   오늘은 그의 생일입니다. 저는 그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는 전화를 받고, 여보세요, 응 왜? 하고 저는 아무 말도 않습니다, 혹은 뭐해? 하고 말 해 봅니다. 그는 말을 하고 저는 웅크리고 으응, 응, 하고 웅얼거리다 침묵이 오갑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는 다음주에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지요, 저는 각도기와 줄자를 들고 와 그와의 관계의 윤곽을 그릴 것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뚜껑을 열고 그 순간 빛은 파동에서 입자가 되어버려 있거나 없거나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저는 항상 없음에 손을 들어주었는데 확인하지 않으면 가여운 고양이는 죽지도 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술잔이 다 비었어요. 이 글은 무엇이 될까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무엇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와 우주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고 합니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대기는 옅어질 뿐이지요. 큰 숨을 내쉬면 이 원자 중 하나는 저 멀리 태양까지, 소행성까지, 베텔기우스, 프로키온 같이 멋진 이름을 가진 천체들까지 닿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제 앞의 창에 부딪혀 도로 제 코로, 폐로 돌아갈 수도 있고요. 그냥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저는 그저 오늘의 착란을, 무엇에게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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