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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Mar 14. 2016

겨울의 끝

우리는 한 철을 넘지 못했다.

 L은 빨대로 블랙 밀크티 한 모금을 들이켰다. 연거푸 마셨다. 검은 타피오카 펄이 띠를 이루듯 몰려왔다. 평소에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맛이 오늘따라 밍밍하게 느껴진다. 펄을 이빨로 으깨며 낮게 퍼지는 단향에 집중할 뿐이다. L은 오늘 단 것, 바삭바삭한 것, 훈훈한 냄새를 풍기는 것들을 다 입에 넣고 싶은 마음이다. 혹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거나. 집에 가고 싶거나. 이불을 덮고 음악을 듣거나. 슬픔의 눈을 직시하면서도 그 늪에서 한 다리를 빼지 않으면서.

 L은 생각한다.

 나는 권태로워서 고독하다. 고독해서 권태롭다. 고독하거나 권태롭다.

 그리고 고독해서 그의 품이 그립다. 하지만 그건 '그'가 아니라, 고독하지 않음에 대한 갈망인 것 같아서 L은 아무말도 할 수 없다.


 누군가를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닐까? 그의 따뜻함이 좋을 뿐. 뜨거울 때는 떠오르지 않는 사람. 식어야만 가능한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인가? 우리 관계는 한 철 뿐인가?

 슬픈만큼 슬퍼하고 좋아한 만큼 그리워하고 힘든 만큼만 울고 싶다는 L이었다.

 태양 아래에서도 마음이 이어질 수 있었더라면, L은 그에게 전화해서 오늘 있었던 일, 고민들, 같이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고 귀엽게 속삭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지막 타피오카가 L의 이빨 사이로 사라졌다.

 L은 이별을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가 보고 싶다. 그의 품에 안겨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찬바람 때문이다.

 사랑의 요절이 슬프지만 어쩌면 애초에 병든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입을 다물기로 한다.

 소멸하는 음악처럼, 찢어진 종이처럼, 혹은 끈덕지게 죽 늘어진 껌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저무는 계절이니까.





앎의 세계도 소중하고 창작과 표현도 행복하지만, 전부라는게 가능하다면, 작은 나와 또 작은 너의 이야기뿐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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