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의 한 틈
계단에 걸터 앉았다. 자동불이 꺼진다.
딸깍, 우웅-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멈추고 문이 열린다. 멀리 어딘가에서 누군가 비밀번호를 치고 집으로 들어간다. '잠겼습니다' 하는 경쾌한 목소리, 그리고 잠잠하다.
건물이 내는 소리, 공간의 공 이 내는 소리, 입을 다물었을 때 입천장과 혀 사이 빈 공간에서 날 법한 그런 소리 안에 있다. 초록색 비상등만 이 그늘 공간에서 말없이 빛을 밝힌다. 나는 계단에 앉아 있다. 시간이 흐른다. 나는 무용한 무언가를 한다. 혹은 하지 않는다.
계단을 처음 발견한 것은 열 다섯살 쯤 되던 해이다. 나는 현관문을 여는 대신 집 앞 계단에 앉았다. 낡은 은색 광택의 엘리베이터가 앞에 있다. 숫자가 올라갔다 멈추는 것을 보고, 엉덩이가 차가워질 때면 왼쪽 오른쪽으로 들썩거리고, 소리가 십사층에 가까워 오면 가방을 들고 한두층 내려가 기다렸다가 문 닫히는 소리가 나면 제자리로 간다. 핸드폰을 하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 희석되었고, 아주 조금 누그러졌고, 집 문턱을 빈 얼굴로 넘을 수 있었다.
밖도 아니고 안도 아닌 곳, 닫혀있지도 열려있지도 않은 곳,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곳, 모두를 위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 곳. 건물의 이 한 틈은 지금과 다음 사이에, 왁자지껄함과 고독 친구와 가족 침묵과 대화 사이에, 긴 띄어쓰기처럼 오래,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무게는 스페이스바를 누르고
그러다 문득 일어난다. 비밀번호를 치고 열리고 문이 닫힌다. 잠잠하다. 자동불이 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