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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May 20. 2021

시간은 흐른다. 고로 미래가 존재한다.

이하영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 리뷰

   

   2016년 봄, 신식 강의동, 강의실 맨 앞자리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왼편으로 스크린이 내려가 있고 파워포인트의 첫 슬라이드가 띄워져 있다.


   “[…] 왜냐하면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99)


   아무 장식 없는 화면 한 켠에 검은 고딕체로 글자가 반듯하게 적혀 있다. 가방에서 주황색 표지의 책을 꺼낸다. 수업은 시작되고 두 사람은 간간히 손을 들고 질문한다. 건장한 체격에 웃음이 큰 선생님은 사소한 질문도 공감하고 격려하며 꼼꼼히 대답한다.



   어느 날 마주한 저 매혹적인 문장을 이해해보겠다고 신청한 수업이었다. 내 삶을, 또 이렇게 존재하는 세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미적 현상’으로서, 오직 아름다움과의 관계에서만 정당화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품고 한 학기 동안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었다. 알 듯 모를 듯,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그리스적 명랑성, 소크라테스와 음악, 실레노스의 지혜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뚜렷한 답을 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철학 수업과 삶 사이에서, 인생에 대한 비관과 긍정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책은 재미있었고 이 수업은 대학 시절 중 가장 티끌 없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시간들이 내게로 되돌아왔다. 내 옆자리에서 맑고 골똘했던 사람이 소설 한 권을 선물한 것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 그 시절 그 봄, 수업을 듣는 모두가 품고 있었을 질문 - 삶의 정당화, 그리고 아름다움 - 에 대한 그녀의 응답이 담긴 책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 리뷰

   - 소설쓰기와 실존, 음악에 대하여


©김연우 / 출처: 철학과 소설 티스토리



  소설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은 독고희라는 인물의 자기 인생 비평이다. 소설을 ‘인생 비평’이라 부르다니 차가운 표현이지만, ‘자서전’이나 ‘자전적 이야기’라고 부드럽게 말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인다. 인물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시선이 냉담하다는 점에서, 또 기억이 닿는 한부터 과거를 샅샅이 훑으며 일일히 해석하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난 순간들이 현재로 자연스레 떠오르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전지적으로 보려는 듯 형광등을 켜고 부리부리한 인식의 눈으로 과거를 내려다본다.


   독고희는 왜 굳이 자신의 인생을 비평할까?

   독고희(‘나’)가 이런 글을 쓰는 데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소설의 시작부터 독고희는 그 이유를 이야기한다.

 

나는 내가 지나쳐온 몇 개의 크고 작은 클라이맥스들이 우연의 연쇄에 불과한지, 아니면 줄곧 어떤 운명을 가리켜왔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기억의 불안정성을 빌미로 우연일 뿐인 것을 운명으로 포장하려 드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실 속의 문제다. 소설 속에서는 우연과 운명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 일치가 내게는 소설 쓰기처럼 버거운 일을 벌일 이유가 되었다.
p.9


   독고희는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밝혀내고자 소설을 쓴다고 말한다. 과거에 일어난 여러 일들, 우연이라고도 치부해버릴 수 있는 여러 사건들을 운명으로 엮어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과거에 얽매여 후회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짊어 지운 삶의 무게를 운명으로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긍정하기까지 하는 것이 그 이후의 삶, 앞으로 다가올 시간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독고희는 더 나아가 ‘실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쓰기는 독고희에게 실존을 위한 도구이다.  


소설은 정말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힘을 내서 그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힘을 내서 돌아갈 때, 소설 쓰기는 취미가 아닌 실존의 기술이 된다고, 그렇게 믿었다.
p.61


   소설쓰기가 ‘실존의 기술’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종종 소설 비슷한 것을 끼적이고, 자주 일기를 쓰며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실존의 기술’이 된다는 이 주장이 대담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실존은 무엇이고 소설쓰기는 왜 실존의 기술이 되는가? 독고희는 힘겨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인생 비평을 통해 무엇을 이루어 내는가? 지난 시간을 운명으로 수용하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아 나가며 삶을 마침내 ‘정당화’하게 될까?


   소설을 읽으며 떠오른 위 질문들에 답하며, 본 글은 ‘소설 쓰기’, ‘실존’, ‘음악’을 중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1. 소설쓰기는 왜 실존의 기술이 되는가?


   여섯 살 때 음악회장에서의 첫 기억부터, 스무 살 마지막 연애까지, 독고희는 가능한 미화를 배제하고 기억을 더듬는다. 과거와 대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솟구칠 때도 감정을 추스르며 계속 소설을 써나간다. 실존을 위해서다. ‘소설쓰기는 실존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실존이란 무엇이고, 인물은 소설 쓰기를 통해 어떻게 실존하게 되는가?


   실존주의 철학에 따르면 실존이란 인간이 처해져 있는 상황이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실존주의의 핵심 주장은 인간 삶의 ‘본질’, 즉 개개인이 태어난 어떤 목적이나 이유가 있기 전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어떤 목적이나 방향, 삶의 이유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는다. 대신 언제나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규정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결국 나는 왜 존재하며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답은 개개인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쓰기는 무엇이기에 실존과 관련이 있는가?

   소설 쓰기, 특히 자전적 소설쓰기는 자신의 삶에 일어난 사건들을 배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자신이 겪어온 시간들을 재해석하여 ‘나는 이런 존재다’ 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나’란 어떤 존재인지 밝혀나간다.

   ‘나’의 이야기를 쓰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같은 물음에 넌지시 답하며 지금과 앞으로를 생각할 수 있다. 정렬되고 매듭지어진 과거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 희미하게나마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그렇기에 소설쓰기는 자기의 존재를 문제 삼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결단하여 창조하는, 실존의 도구가 될 수 있다.





2.  소설쓰기를 통해 무엇이 드러나는가?


   그렇다면 독고희는 소설쓰기를 통해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가는가? 소설을 써서 드러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것은 독고희를 어디로 나아가게 하는가?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나’는 자신의 본질이라고도 부를 만한 특성들과 마주한다. 특정 사건과 감정이 계속 되풀이되는 듯 보인다. 또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방식에도 불변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이러한 반복은 ‘나’의 운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떠오른 것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하는 중립적인 발견이 아니다. 또 ‘이전에는 내가 이러했으니 앞으로는 이러해야지’ 하며 미래를 밝게 전망케 하지도 않는다. 집요하게 써 내려간 자기 서사의 결론은 오히려 ‘나’를 짓누른다. 이야기는 말한다. ‘나는 틀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 시절의 나를 짓누른 것은 과거만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비슷한 일들이 되풀이되리란 그 예감이 가장 무거웠다. 내가 사랑받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리고 누군가 나 따위에게 사랑을 건네줘도 결국은 그 아름다운 사람들을 내 손으로 다시 공격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귀납의 끝에 스스로를 변호할 의욕도, 능력도 잃어버렸다.
p.151


   ‘나’는 자신에게 사랑을 주었던 모두를 공격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소중했던 두 친구부터 엄마의 삶까지 ‘나’는 엇나가게 하고, 상처 입히고, 굴곡지게 했다. 그리고 이에 수반하는 ‘죄의식’은 ‘나’의 본질적인 심리상태라도 된 듯 매 순간에 배어 있다. 여기에 더해 ‘나’는 몇 가지 감정이 자신에게 근원적임을 발견한다.


우유부단한 성격에 걸맞게 나의 감정은 늘 대립하는 모습으로 이성과 적당히 버무려져 반응을 이끌어내곤 했다. 내 신체와 영혼을 잇는 길목의 이름은 두려움과 이끌림, 가증스러움과 안타까움, 자기혐오와 동시에 자신에 대한 비밀스러운 애착,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었다. 그처럼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기는 힘이 내 존재를 움직이고 내 작은 역사를 만들어왔다.
p.79


   냉정한 자기 인식은 가증스러운 양가감정을 드러냈다.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욕망하는 대상에 은근하게 다가가고 싶어하는, 두 근원적인 파토스이다. 또한 이러한 감정 한복판에는 뿌리깊은 자기 중심성과 쉼 없이 생각하는 이성이 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라곤 없는 “부풀려진 에고”로 ‘나’는 항상 끝없이 생각하고, 해석하고, 판단한다.


나는 내가 겪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보다 마치 그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문장화시킨 후에야 받아들일  있었다. 갑옷이 사람을 방어하는 동시에 무게를 지우듯, 언어는 내게 차분한 성격을 선물했지만 이성의 작용 속으로 나를 가뒀다. 쉽게 말해 중학교 때부터  의식은  번도 입을 닥쳐본 적이 없었다. 나는  순간 무언가를 기술하거나 분석했다. 멍을 때린다,  말이 대체 어떤 의식 상태를 가리키는지 몰랐고,  초만이라도 멍을 려보는  어렸을 때부터의 소원이었다.
p.80
사실 엄마에 대해서조차 진정한 관심은 없었다. 나는 내 감정의 앞가림을 해내기도 바빴다. 어느 시절이건 내게는 늘 나뿐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처럼 부풀려진 에고야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면모였다. 이런 자기혐오마저 에고의 발로인 것 같아 힘이 빠진다.
p.147


   이렇듯 과거를 낱낱이 조명하자 드러난 것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오만함, 세계에 대한 두려움, 가증스러움과 자기혐오다. 이러한 감정이 자신에게 근원적인 것임을 발견했다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나에게 사랑을 준 사람들을 상처 주고 공격하는 게 내 서사의 반복되는 줄기라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의 가슴도 덩달아 폐허가 돼버린 듯했다.
 철학이 사라지면, 철학마저 사람을 구원하는 데 실패하면 무엇이 남는가에 대해 이따금 생각했다. 철학의 빈자리에 대한 철학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틀로만 남은 책장 앞에서 겨울을 났다. 서재를 떠난 현정민이 부쳐준 돈을 기생충처럼 받아서 밥을 해먹었다. […] 하지만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을 뿐 새 시작을 위해 의지를 다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당장의 무기력을 가능한 한 길게 끌고 싶었던 것 같다.
p.263-264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시작한 탐색이 막다른 골목에 내달았다. 생각하기와 소설쓰기는 벽에 부딪혔다. 과거의 사건들을 배열하고 성실하게 해석한 결과 나의 존재 의미는커녕 내 존재가 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 지경이다. 무기력 속에서 시간이 흘러간다.

   그런 ‘나’를 구원하는 건, 음악이다.






3. 음악이란 무엇인가?


   사실 음악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피아노는 인물 간의 관계에 중심적 역할을 하고, 주요한 사건이 콩쿨과 연주회장에서 일어난다. 서사의 넝쿨은 음악을 타고 흐른다. 쇼팽의 녹턴, 에튀드, 발라드, 라벨과 드뷔시의 일렁이는 음들, 간간이 흘러나오는 라흐마니노프나 바흐까지, 챕터마다 트랙이 재생된다.

   단지 삽입곡이 아니다. 음악영화에서 음악이 주인공 못지 않게 영화의 주연이듯, 이 소설은 음악소설이다. 음악이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미학적 고찰이자 음악의 경험을 언어화하려는 시도이다. 음악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들이 페이지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이다.

 

더 커서도 나는 이따금 쇼팽과 바흐의 대조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의 말대로 바흐를 듣는다는 건 하늘의 명랑한 질서가 눈앞에 가리켜지는 경험이었다. 명랑한 곡이 아니라 해도,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듯한 시선만은 그대로였다. 반면 쇼팽의 음악은 문자 그대로 자장가인 베르쇠즈처럼 아주 꿈같은 멜로디조차 땅에 붙박인 느낌을 줬다. 하늘을 겨눈다 해도 녹턴에서와 같은 밤하늘이었으며, 그런 때마저 서사는 어둠 아래의 인간, 어둠 아래의 더 큰 어둠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유 모를 묵직함 탓에 힘이 빠지기도 하고, 외려 야릇한 용기가 솟기도 했다.
p.127-128


   그렇다면 왜 음악인가? 철학을 하고 소설을 쓰는 ‘나’에게 음악은 무엇인가?  

   언어와 음악의 차이에 대한 언급이 소설 속에 종종 등장한다. 언어가 의미에 매여 있다면, 음악은 의미를 규정할 수 없다. 특정 음이 어떤 의미인지, 특정 마디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해석할 수 없다. 이렇게 음악은 어떤 뚜렷한 주장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또한 언어는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귀속되어 있지만 음악은 작곡자나 연주자를 초월해 있다. 음악을 만드는 이는 뒤로 물러나고 음악 그 자체가 전경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음악을 “승리자들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내 삶에서만큼은 음악이 승리자들의 예술인 반면, 소설은 패배자들의 예술이었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자꾸만 나는 이렇고, 그것은 내가 이랬기 때문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뻔뻔하게도 자기 존재를 해명하고자 했다. 오히려 결함이 없거나 용인 가능한 결함만을 가진 음악가들이 ‘나’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건반 위의 음악은 적어도 겉으로는 인칭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마저 몽롱함에 취해 주체의 지위를 버리게 만들지 않던가?
p.219


   이렇듯 음악은 듣는 이를 내면의 끝없는 자의식으로부터 음악의 흐르는 시간 속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힘과 흐름 안으로 데려간다. 음악에 집중하며 “몽롱하게 취하”는 동안, 듣는 이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음악이 만들어내는 찰나와 하나가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 자기 서사를 되짚으며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려던 ‘ 자신이 만들어 놓은 좁은 의미망 안에 포위되어 버렸다. 철학과 이성, 언어와 사유는 ‘ 구원하기는커녕 나아가려는 의지조차 소진시켜 버렸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다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에 들린다. 그러다 우연히 음악대학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쇼팽의  세번째 다단조 녹턴이다.


 연주는 중반부의 ‘조금씩 더 느리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아름다운 누군가가 내게 귓속말을 속삭이는 것 같기도, 강물이 굽이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세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 흐름에 젖고 싶었다. 마지막 부분인 ‘그 전보다 두 배 더 빠르게’에 이르렀을 때는 음악에 완전히 휩쓸려 있었다. 녹턴의 선율에는 뭐라고 묘사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게 그저 멈추지 않는 힘이 배어있었다. 모든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원초적 힘 그 자체.
 이 힘은 의미의 무한한 해석을 낳았지만 답을 내주지는 않았다. 답 없이도 나아가자며 뻔뻔스런 제안을 해올 뿐이었다. 한 음을 거치면 다음 음, 한 마디가 끝나면 바로 다음 마디가 이어졌다. 그 제안이란 매 순간에 깃든 기회이자 시간의 숨겨진 역할이었다. 그랜드 피아노가 나를 대신해 흐느꼈다. 그토록 무심해 보였던 세계가 나를 떠미는 듯했다.
p.267


   절망 속에 있는 ‘나’에게 음악이 들려온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흐르고, 진행되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 음악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답 없이도 나아가자며” 음악은 그 몰아치는 선율을 통해 강력하게 제안하는 듯하다. ‘나’는 되뇐다.


“시간이 흐른다.”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좀 전의 발견을 세상에 알렸다.
“고로 미래가 존재한다.”
p.268


   음악을 통해, 무의미와 무기력 속에 있던 인물에게 변동이 일어났다. ‘나’의 영토가, ‘나’의 지각판이 흔들렸다. 지진이다, 이동한다. 감성과 직관에 균열이 생겼고, 그 곳으로 다른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물론 삶의 기조는 손쉽게 바뀌지 않으며 완전히 다른 영혼으로 곧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달리 보기 시작한다.


   어느덧 ‘나’의 소설쓰기는 막바지에 이른다. ‘나’는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과거의 장면들을 재해석하고 이에 대해 썼다. 이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분석과 사유는 삶의 의미에 대해, 내 삶이 지속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지, 지속된다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답해주지 못했다. 대신 분석이 남기고 간 폐허에, 음악이 흘러 들어온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힘이, 감동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움직여야 할 합리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선율에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간다. 그럴 수 있고, 그러고 싶다는 마음의 불씨가 사소하게나마 피어 오른다. 정당화의 논리는 알 수 없지만 삶은 어쩌면, 감정적으로는 정당화된 듯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서서히 이야기 밖으로 걸어 나온다. ‘나’는 용기를 내 옛 친구에게 연락을 한다. 조심스레 선택한 문장으로 옛 행동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나’는 계속 살아간다. 음악을 듣고,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보고, 생각을 한다. 행동을 한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 의 핵심 테마 ‘소설쓰기’, ‘실존’, ‘음악’을 중심으로 소설을 읽어 보았다. 이 글의 전개를 위해 많은 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독고희의 여정과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은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책을 직접 읽으며 만나보기를 바란다. 여기서 간략하게 언급한 인용구들 이상으로 아름다운 표현과 핵심을 찌르는 문장들이 이 소설에 많다.

   ‘실존’, ‘삶의 의미’ 같은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자신이 생각이 참 많은 것 같아 다소 불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또한 클래식 음악에 애정이 있고, 글로 쓰임으로써 음악의 맛이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는지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아마 수도 없이 밑줄을 치게 될 것이다.




   아래 블로그에 가면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구입처를 확인할 수 있다.

https://diephilosophin.tistory.com/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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