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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Jul 23. 2021

독서와 산책

책을 읽는 방법

   요즘 영어로 된 철학서들을 읽고 있다.


   읽기 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문장에서 문장으로 넘어가며 통째로 삼키듯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 단어에서 그 다음 단어로, 하나씩 멈추며 읽는다. 앞 단어에서 의미, 이미지, 연상들이 뻗어나가 다음 단어와 연결된다.

   예컨데 이런 식이다. 주어가 undercut 동사를 만나면 눈 앞에 난데없이 칼이 등장한다. 칼은 휘둘리고, 풍선처럼 목적어의 바람이 빠져나간다. 관용적인 표현도 단어 그대로의 이미지로 먼저 다가온다.  hold together에서는 손이 나와 여러 추상적인 요소들을 한데 쥐고 있고, call attention to에서는 확성기처럼 두 손을 입에 대고 외친다. 여기요, 여기 보세요!  tempting을 지날 때 나는 흔들리고, 유혹되고, 눈을 파르르 떨며 헐떡이고 있다. 그저 자리를 채우는 단어들이 아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이 말이 이 순서로 여기에 있기에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장들이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린다. 페이지는 무대가 되고 읽는 눈은 장면들을 상상한다.


   아주 느리게 문장 속을 걷는다. 호출되지 않았던 기억들이 불러지고, 생각지 않았던 관점이 열린다. 세상을 이렇게도 정밀하게 볼 수 있구나, 하나와 하나 사이에 이렇게 많은 스펙트럼이 있었는데, 그 때 그 느낌은 이런 시스템 때문이었던 걸까. 이 꼼꼼한 산책의 감각, 동요, 사유의 미적인 충격과 즐거움을 몸이 기억하기를. 내 언어에도 이들의 목소리가 스미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로 문장의 길을 따르다가, 때로는 점프하고 걸러읽고 되돌아온다. 마침표 뒤에, 띄어 쓰인 사이에 작가의 표정이, 한숨이나 짖궂은 웃음이 배어 있다.


   맑고 명료한 지성, 날카롭고 애정어린 지성.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자, 뜨거운 마음을 냉각시킨 강한 글.

이 글을 쓴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작가들은 하나하나 나와 비슷한 인간일 것이다. 점심으로 차가운 샌드위치를 우그적 베어 먹으며 머리 한 켠에 굴러가고 있는 생각에 신경을 쓰다가, 대강 소화를 시키고 컴퓨터 앞에 앉아, 혹은 펜을 들고 글을 쓰는 사람들. 그러면서 한 생에서의 어떤 최선을, 개성을, 밀도를 보여주는 사람들. 멋지다. 인간에게도 이런 것이 가능하구나. 이 거대히 엉켜있는 시대에 한 인간이 이런 눈빛과 제스쳐와 목소리를 낼 수도 있구나.


   다행히 좋은 책들이 수도 없이 많다. 매번 다른 산책로에서 다른 리듬, 다른 풍경으로 사람과 세상에 대해, 비밀과 가능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행히, 이제서야 조금, 읽는 법을 알 것 같다. 호흡하고, 상상하고, 느끼고, 멈추어 서기. 한 구멍에 빨려 들어갔다가 반대편에서 나와 무릎을 털고 다시 걷기. 곱씹기, 기억하기, 나도 말을 시작하기.


   불편함, 놀라움, 거부감, 번쩍임, 즐거움. 문장 사이에서 몸을 뒤틀다 보면 어느새  이마가 안에서부터 지끈거린다. 신경들이 연결되며 열을 낸다. 잠시 일어난다. 머리를 식히자.

   그리곤 다시 책을 집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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