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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Jul 15. 2020

왜 글을 쓰는가

재현에의 욕구


1. 페르난두 페소아로부터 가져온 구절들



"모든 것을 모든 방식으로 느끼는 것. (중략) 수동적인 신체 작용에 그쳐서는 안 된다. 반드시 능동적인 지적 작업을 동반해야 한다. (중략) 무의미한 단순 감정을 예술적 감정으로 변화시키려면, 또는 예술적으로 만들려면, 이 감각은 지성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크기는 내 키가 아니라

내가 보는 만큼의 크기니까......"


"도시에서는 삶이 더 작다

여기 이 언덕 꼭대기에 있는 내 집보다.

도시에서는 커다란 집들이 열쇠로 전망을 잠가 버린다,

지평선을 가리고, 우리 시선을 전부 하늘 멀리 밀어버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크기를 앗아 가기에, 우리는 작아진다,

우리의 유일한 부는 보는 것이기에, 우리는 가난해진다."


"나의 시선은 해바라기처럼 맑다.

내겐 그런 습관이 있지, 거리를 거닐며

오른쪽을 봤다가 왼쪽을 봤다가

때로는 뒤를 돌아보는......

그리고 매 순간 내가 보는 것은

전에 본 적 없는 것,

나는 이것을 아주 잘 알아볼 줄 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진짜로 태어났음을 자각한다면 느낄 법한

그 경이를 나는 느낄 줄 안다......

이 세상의 영원한 새로움으로

매 순간 태어남을 나는 느낀다......"




2.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내가 매일 걸어들어가는 사회 조직, 관계의 망, 거기서 불리우는 나의 이름이 달라지면서 내가 세상을 감각하던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새로운 사람과 자극과 얽히고 있다.


한 단위가 종료된 후 글을 써 보려고 하였으나 굳이 적힐 필요 없는 껍데기 같은 단어들이나 주변인들에의 입에서 입으로 옮아 들어온 반응들만이 쓰였다. 현장의 속도와 내 역할이 요구하는 예민한 긴장의 옷을 채 벗지 못한 나에겐 되돌아보기에 필요한 거리가 부족했다.





3. 재현에 대하여


왜 나는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좋아하는가, 왜 그런 것들을 찾는가.

왜 현장의 경험 속에서 몸을 뒹구는 대신 가만히 글이나 그림이나 스크린을 바라보려 하는가.

이 과정이 없으면 왜 불완전하고 안정되지 않다고 느끼는가.


바라보기, 관조하기, 관찰하기.

외양과 대화, 풍경과 소리, 냄새, 촉감, 감각과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것.

나에게 어쩌면 깊고 근원적인 기쁨을 주는 일이다.


다시 써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상황의 전개 속에서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연출하는데 신경을 집중하다보면 전체를 충분히 바라보고 느끼고 의미화할 수 없기에, 그 시간의 조각들을 다시 보고 다시 느끼기 위해 쓰는 것은 더욱 필요하다.




4.


하지만 요즘 도통 글이 써지지 않는다. 쓰려는 의지가 솟아오르다가도 종이를 마주하면 헐거운 문장들과 푸념들, 결심들만을 적어내리고 있다. 업무 수행에 필요한 속도에 맞게 내 시선은 피상적이게 되었다. 내 안에서 길어올릴 느낌이랄 게 없다. 간혹 마음에 드는 파편들도 한 편의 글로 기워지지 않는다.




5. 로저 프라이의 재현론


 로저 프라이는 예술작품을 통해 현실을 다시 보여주는 것(재현)이 왜 필요한지 주장하기 위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 특성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실제 삶(actual life)과 상상적 삶(imaginative life)이라는 두 삶을 사는데, 각각의 삶에서는 서로 다른 종류의 인식작용이 이루어진다.

 실제 삶은 우리가 살고 있는 매일매일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상황, 사람, 사물을 인식하고 이에 반응하는 행동을 한다. 우리는 주변의 여러 자극들 중에서도 그 상황에 중요한 특정 대상을 선택해 이들에게 감각을 집중한다. 언제나 행동을 하며 대응하고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그 순간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도, 그 순간의 자신의 감정도 명확히 지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실제 삶만을 사는 것은 아니다. 상상적 삶도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상상적 삶이란 과거의 경험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우리가 그리는 정신적 이미지이다. 이런 그림을 그림으로써 우리는 두 번째 삶을 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추상화시킬 수 있고 온전한 관찰자로서 상황에 임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선택과 집중도 필요 없어지고 시야기 넓어진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게 된다. 이 때 우리는 경험의 감정적 측면에 더욱 집중할 수 있고 감정을 그 자체로, 그 자체를 위해서 인식한다.




6.


나와 '나'의 경계를 넘나들기.

출근 전, 퇴근 후에는 '나'로서 내 이야기인듯 아닌 듯한 글을 쓰고 있다. 서너걸음 멀리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꿈꾸듯이 걸어가다가 회사 문을 들어서면서 찬찬히 나로 돌아온다. '나'의 목소리가 크례센도와 데크레셴도를 그리는 일상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예전에 끼적였던 글을 올려본다.

 

한 시기에는 그 시기에만 쓸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낱낱이 예민하게 가르는 문장들과 잘 흘러가는 이야기 사이에서 두 줄을 자유자재로 당겼다 놓았다 할 수 있었으면.




-표지 이미지: 임노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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