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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시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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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Jan 08. 2020

정재호, 도시의 나이를 기록하는 작가

   

<북악기념비-정릉스카이아파트>(2005)


   정재호 작가는 2005년작 <북악기념비-정릉스카이아파트>에서 130x388cm의 한지 화면 전체를 ‘스카이 6 아파트’의 정면 외관으로 채웠다. 4층짜리 복도식 아파트는 벗겨진 칠과 얼룩덜룩한 때, 먼지 낀 창과 낡은 철문으로 지난 시간들 속에서 쇠락했다. 먼 거리에서는 정밀하고 진짜 같아 보이는 그림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흰색, 회색, 검은색의 붓터치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붓질은 건물의 페인트 자국 같은 느낌을 주며 건물의 삶과 나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벽과 창문 위에 덧발린 반투명한 물감은 멀리서 먼지나 거미줄처럼 보여 건물이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이룬다. 규격화된 주거 공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집마다 조금씩 다르다. 창에 덧댄 판자나 커튼, 창의 열리고 닫힌 정도, 집 앞에 놓인 화분과 초록 식물은 여기에서 진행되는 삶의 단면을 드러낸다.



   정재호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성북구 정릉3동에 있는 스카이 아파트를 그렸다. 1969년 준공된 이 아파트는 47년 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가 2016년에 철거되었다. 이 밖에도 정재호 작가는 만들어진 당시에는 깨끗한 흰 벽에 활기찬 모습으로 선망의 대상이자 현대적 주거공간의 아이콘이었을 1960~70년대의 시범 아파트 단지나, 연대를 알 수 없는 낡은 건물들을 세밀한 필치로 그린다. 현재 서울대미술관에 위 작품과 나란히 걸려있는 <소공로 93-1>(2018)와 <건국빌딩>(2019)이 그 예이다.


<소공로 93-1>(2018)
<건국빌딩>(2019)

   그의 건물들이 주는 생생함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동양화가로서 정재호 작가가 선택한 매체에 주목하게 된다. 한지에 아크릴릭 물감으로 채색하는 것이 그의 주된 작업 방식이다. 한지에 그린 이 그림들은 물감이 종이에 베어 있거나 종이로부터 스며 나오는 듯하고 형상이 종이에 밀착되어 있어 벽면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벽면 자체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 모든 그림에서 일관되게 정재호 작가는 정면에서 본 건물의 파사드를 화면에 채워 그린다. 이러한 선택은 작가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작가는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건물이 더 황폐하거나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구도를 선택하거나, 건축물을 주변 경관의 맥락 속에 위치시켜 현재의 도시 풍경 속 건축물의 지위나 거주민들의 사회적 열위를 문제 제기하는 비판적인 발언을 하기보다 건물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정릉스카이아파트 사진


   그의 시선은 건물이 겪은 오랜 시간을 드러내는 단서들에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누적된 일상과 그 시간으로 낡고 늙어버린 건물 자체의 주름을 충실하게 그리며, 풍경에 담겨있는 비가시적인 시간을 볼 수 있도록 형상화한다. 그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도시를 다시 보게 된다. 그의 그림들에 한번 발이 묶인 이후라면 거리의 건물들, 창, 벽면의 패임들을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관찰하고 그 속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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