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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그림 Dec 12. 2020

글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인쇄물의 실험, 아트선재센터 <방법으로서의 출판> 展

아트선재센터에서 <방법으로서의 출판>展 을 연다.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소규모 출판 실천을 중심으로, 예술 활동을 드러내고 정리하는 방법으로써 출판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다. 독립서점과 출판사를 운영하는 기획자 임경용이 그래픽 디자이너, 큐레이터, 사운드 아티스트 등 인쇄물이라는 매체로 실험을 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텍스트와 이미지를 보여주고 담론을 추동시키는 방법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참고 지점이 많을 전시다.




본 글에서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전시되었던 <WRITING BAND>의 작업을 중심으로 전시를 돌아보고자 한다.

라이팅밴드는 현시원 큐레이터와 그래픽디자이너 홍은주, 김형재가 중심이 되어 4년마다 진행되는 글 프로젝트이다. ‘http://www.writingband.com/연도’ 의 형식으로 만든 웹사이트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이 프로젝트는, 온라인 공간을 통해 글을 전시하는 방법을 실험한다.  


   이 프로젝트는 온라인이 가능케하는 특징들을 활용한다. 오프라인에서는 독자들이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목차를 통해 읽고 싶은 페이지를 선택하거나 책장을 넘기는 것으로 한정되는데 비해, 온라인에서는 독자들이 더 다양한 액션을 취할 수 있다. 페이지를 확대/축소 하기도, 하이퍼링크를 통해 다른 곳으로 곧바로 연결되기도 하며, 아예 해당 웹페이지 밖 다른 링크로 나갈 수도 있다. 또 보통 책처럼 수평적인 방향으로 글을 진행시킬 수도 있지만 글을 수직적으로 쌓을 수도 있다. 이렇듯 웹페이지의 형식적 특징은 라이팅밴드가 글을 보여주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한편, 글의 내용 또한 온라인 공간이라는 매체에 부합하게 바뀐다. 인쇄 지면의 글이 논리적으로 완결되어있고 상대적으로 긴 분량인데 반해, 라이팅밴드의 웹용 글들은 파편화 되어있고 글-조각들을 수집함으로써 독자들 각각이 글을 읽은 순서에 따라, 각각의 글에 부여한 중요도에 따라 의미의 울타리가 만들어지도록 한다.


writingband.net/2020
writingband.net/2020

 2012년부터 세차례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각각 그 실험의 초점이 다르다. 2020년에는 전시장의 형식을 빌려와 전시장 벽면에 붙이듯 글이 온라인에서도 디스플레이 되었다. 글들은 제목이 페이지를 새로고침할 때마다 계속 바뀌는데, 그래서 독자는 같은 글이더라도 새로운 제목들로부터 새로운 기대를 하며 읽게 된다. 이 중 몇몇 글들은 오프라인 전시장으로 옮겨와 조각이나 설치로 물질화된다.



2016년에는 ‘시간’에 초점을 두고, 연표의 형식으로 글을 제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 웹페이지에는 미술관의 개관부터 2016년까지의 주요 사건과 전시들이 표시된 연표가 있는데, 독자들은 그 연표를 확대/축소 하면서 관심이 가는 사건을 클릭해볼 수 있다. 그러면 그 사건과 관련한 글의 창이 회고록, 비평, 전시평가서 등 여러 형식으로 화면에 뜬다.


writingband.net/2016
writingband.net/2016



2012년에는 글을 통해 ‘공간’을 조명하는 방식을 실험했다. ground, 1F, 2F, 3F 라는 미술관 공간 지도가 추상적으로 제시되고, 지도 위의 점들을 클릭하면 해당 공간과 관련된 글이 제시된다. 글들은 당시 이루어졌던 전시와 작품들을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이 공간이 미술관 관계자와 관람자들에게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단편소설, 트위터 단문, 뒤샹의 가상 체험록 등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writingband.net/2012
writingband.net/2012


기존 웹디자인의 관습을 깨고 글을 위해 유동적으로 만든 웹페이지도 눈길을 끈다. 전형적인 책의 형태에서 벗어나서도 텍스트를 더 효과적으로 재미있게 보여주는 방법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프로젝트다. 글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해진 매체환경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한편 전시장 한 가운데 넓은 테이블에서는 진 쿱 ZINE COOP이 수집한 홍콩의 출판물들을 볼 수 있다. 홍콩민주화, 퀴어 등 여러 사회운동과 관련되어 출판된 진들이 테이블에 흩어져 있다. A4종이를 책처럼 접어 단순하게 만든 만평부터, 엽서의 형식으로 진행된 사진전까지 저예산 인쇄물에서 이루어진 여러 시도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또한 아카이브 전체는 아래로부터 이루어진 사회적 발언의 흐름과 총체를 보여준다.


국내외 소규모 출판물들이 정원처럼 전시된 후팡의 <책을 위한 집>에 앉아 책장을 넘겨보면서 전시장 밖으로 가지고 나갈 도서 목록의 하이퍼링크를 작성하다보면 글쓰기와 독서에 대한 의지가 차오를 것이다. 텍스트 기반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쇄물이라는 매체로 어떤 형식적 실험이 가능할 것인지 영감을 얻어가고 싶다면 전시장을 방문하기 권한다. 전시는 12월 20일까지 아트선재센터 1층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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