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보안여관 <식물계 Plantae>
통의동 보안여관의 2020년 상반기 기획전시 <식물계>는 식물과 인간이 맺고 있는 기존 관계에 질문을 던지며 식물을 지배, 이용, 대상화하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를 넘어서 식물을 인식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제안한다. 전시가 제시하고 있는 ‘전일적 사고', 즉 인간과 자연 간의 이원론적인 분리 극복이 자칫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식물을 인간과 동등한 지위에 놓고 탐구해나가려는 세 작가의 작업을 통해 전시는 이러한 확장된 사고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를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구관 1층 입구로 들어서면 이소요 작가의 심도 있는 리서치들을 만나게 된다. 미술이 식물을 다뤄온 방식에 대한 텍스트와 이미지 아카이브 <예술이 식물을 다루는 방법들에 대하여>를 시작으로, 그가 오래 연구해온 <동백나무> 작업이 펼쳐진다. 아마도 예술공간 <어스바운드> 展 당시 선보이고 이번 전시에서 추가 답사와 채집을 통해 발전시킨 작업이다. 강요배의 회화 <동백꽃 지다>에서 출발한 이번 작업에서, 이소요는 동백나무의 생태를 관찰하기 위해 한라산과 선흘 곶자왈 동백나무 군락으로 나섰다. 전시장을 채운 사진과 표본들은 식물 자체의 생태를 확인하고 이해하고자 한 그의 탐구 과정을 보여준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비교해가며 꼼꼼히 작품을 따라가다보면 식물도감의 이미지나 원예용 동백나무와 한데 묶어 지목하기 어려울 만큼 한 종의 삶이 발현되는 수많은 갈래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야생 동백나무들이 환경적 제약에 적응하고 인간의 교란에 반응하며 스스로를 변형시킨 모습에서는, 서식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 결코 수동적이지 않고 환경변화에 취약한 피해자로 결코 대상화할 수 없는 동백나무의 생명체로서의 집요함이 보인다. 다른 방에서는 동백나무의 생애주기, 씨와 열매들의 다양한 모습들, 병에 걸려 변이된 형태들을 담은 표본들이 진열되어 있다. 무엇이 씨고 무엇이 열매지? 악편, 화판, 꽃부리는 무엇이지? 각 기관들의 명칭도 역할도 분간하지 못하는 모습에 그 동안 식물을 낭만화할 뿐 그 삶에 무지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한 층 더 올라가면 거대한 프린트들과 마주한다. 식물에 직접 잉크를 도포해 찍어내는 네이쳐 프린팅 기법으로 제작한 이 작업에서는 잎맥 하나하나가 그 주름의 깊이만큼 종이에 자국을 낸다. 싱가포르 식물원의 수석 연구원인 미켈레 롯다가 싱가포르 자생 식물들을 네이쳐 프린팅 한 작업들이다. 기존의 식물 이미지들이 개체의 해부학적인 세부가 사라진 채, 빨갛고 노란 꽃과 초록빛 잎으로 재현되던 것과는 다르다. 객관성에 근접한 이 이미지들은 우선 식물을, 잎과 그 세부를 들여다볼 것을 요청한다.
벽과 천장이 식물들로 온통 드리운 책방을 지나 신관 지하 1층으로 가면 과학실에 들어선 듯한 풍경과 마주한다. 라이트박스와 돋보기, 현미경과 프레파라트,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엄중성의 외양을 더 들여다보면 정밀한 연구보다는 다소 엉성하고 왕성한 호기심과 마주하게 된다. 전혜주 작가는 옷에 묻은 꽃가루를 떼어낸 테이프, 자동차 유리에 쌓인 먼지, 보이차와 아카시아 꿀 원액 등 주변의 익숙한 대상들을 일단 현미경 아래로 가져간다. 맨눈으로 잘 보이지 않는 미시적 세계에 집중해 식물의 꽃가루와 같은 미립자들이 환경에 대해 말해주는 바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미경 속 이미지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인간의 축척을 벗어난 단위에서도 식물, 균, 각종 유기, 무기물들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으며, 익숙한 시각에서 벗어남으로써 어떤 이해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식물의 입장에서 생태적 주관성을 상상해보았다. 인간이라는 포괄적인 종정체성 안에서 정의하는 이성과 감성, 의사소통의 논리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식물은 낯선 생리, 생태, 생활형을 지닌다. 비닐봉지에 담긴 채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상춧잎의 세계로 아무리 깊이 들어가 본다 해도, 더 잘 알기 위해 직접 키우며 생장을 목격한다 해도, 이윽고 먹어서 몸의 일부로 흡수한다 해도 우리가 그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훈련을 통해 세심하고 겸손한 감수성을 가지면서 그 삶에 대해 짐작해볼 수 있다. 비록 그 상상이 또 하나의 오해를 부르게 될지라도.”
-이소요 <제주도 동백나무와 보낸 이틀 – 그림 속 식물의 생태적 주관성을 상상하며> 중-
전시의 출발지점에 다시 서서 질문해본다. 식물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공생하는 대등한 생명체로서 대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식물의 삶을 의인화하거나 상징적 의미로 환원하는 것, 혹은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소비하는 것은 식물과 가까워지는 듯 보여도 여전히 인간의 편의대로 식물을 재단하는 인간중심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 식물 그 자체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또 인간 종의 기준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인식능력의 제약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식물에 관심을 가지고 식물 그 자체를 이해해보려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식물의 다양한 양태를 관찰하고, 인간과는 다른 생애주기와 번식방식을 이해하고, 미시적, 거시적 스케일을 오가면서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생물들을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자세가, 이제 우리에게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