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배는 옆 사무실에서 지내면서 오다가다 자주 만났다.
화장실을 자주 가다 보니 만날 기회가 점점 늘어났다.
항상 남들을 신경 쓰지 않는 멋진 긴 머리에(남성이다) 패션센스까지. 남달랐다.
회사에서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부류는 아니었다. 퇴직이 몇 년 안 남았지만 동기처럼 임원은 달지 못했다. 그저 그 주위만 계속 빙빙돌며 한직에서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선배에게서는 왠지 모를 당당함이 느껴졌다.
비굴하지 않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인 듯하다.
친하지는 않지만 말을 좀 섞고 싶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은
그런 선배였다.
어느 날 기회가 됐다.
빈 사무실에 혼자 있는 나를 보고 말을 걸어온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선배는 자신은 미리부터 자산관리를 잘 준비해 놨다고 했다.
40대 초반쯤? 남들에 비해 그렇게 이른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에라도 시작하는 것은 내 기준으로는 깨어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퇴직을 앞두고서야, 닥쳐야 퇴직 이후의 삶을 고민하니까 말이다.
(침고로 얼마 전 진짜 명퇴를 앞둔 선배를 만났을 때 그 선배는 다음 주에 퇴직 관련 상담을 받아본다고 했다.
거기에 비해서는 얼마나 빠른 것인가.)
그 선배는 재테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줬다.
주위에 자발적이 아니라 강제 퇴사 당하는 것을 많이 봤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생겼다는 것이다.
자식도 둘이나 있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부동산 이외에 금융자산 20억 원!
그리고 당장 부동산 책을 사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맘에 드는 책은 직접 저자에게 연락을 취해 만나기까지 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들어보니 제목이 조금 갸웃할 만한. 기획 부동산 업자 같은 느낌도 났지만 그 전문가를 만나 전국에 임장도 자주 돌아다녔다고 한다. 결국 사기를 당한 건 없으니 그 전문가는 선배에게 고마운 선생으로 남게 됐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재테크를 하기 시작했고 예순 살이 머지않은 지금은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아 보였다. 부동산도 어느정도 금융자산도 어느정도 일군듯 보인다.
굳이 자랑하듯 말하진 않아도 '나 그 정도는 해 놨어'라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심시간 팀원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는 모습도 자주 봤다.
그 선배의 당당함은 본인이 언제 잘려도 괜찮을만한 여건을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나는 입은 살아있고 회사에 까칠한 소리도 해대면서 정작 잘리면 대책이 없다.
그 선배는 유연함을, 나는 뻣뻣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정적 차이는 바로 자산.
나는 불과 몇 년 전 큰 일을 겪고서야 내가 경제적 독립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에라도 깨닫게 된 게 어디냐 싶지만 참으로 늦은 편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늦은 때는 없다.
대기만성형 인간을 꿈꾸는 나에겐 지금에라도 늦지 않다.
시작은 늦어도 적응력, 학습력은 빠른 것이 그나마 내 장점이기 때문이다.
그 선배는 예술가 같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 등 뒤에서 자신감이 보인다.
'회사야 나를 잘라 봐! 나는 굽실대지 않고, 나는 아쉬운 소리 안 하고 내 갈길을 갈 거니!'
라는 당당함을 흘리고 간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점심을 사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