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 타고 태평양 항해를 마친 임수민 포토그래퍼
만날 때마다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속이 따뜻하게 충전된 듯한 기분이 들고 좋은 자극을 주는 사람.
흑백 필름으로 거리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 임수민은 나에게 그런 친구다.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고 밝고 얘깃거리가 넘친다. 한바탕 수다를 떨며 깔깔대다가도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멋진 말을 던져서 불시에 영감을 주는 사람. 모험을 좋아해서 최근에는 5개월간 요트를 타고 태평양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까무잡잡한 피부에 곱슬머리까지. 진짜 현대판 모아나가 따로 없다.
왼) 포토그래퍼 임수민 오) 모아나 (닮았어!)
안 그래도 할 얘기가 많은 친구였는데, 여기에 태평양 항해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이 사람 안에는 얼마나 많은 세계가 내재되어 있을까. 앞으로 또 얼마나 재밌고 멋지고 신기한 세계들을 발견하게 될까. 문득 그녀의 시선을 사진이란 매개체를 통해 엿볼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5개월간의 항해 이야기를 담은 캐논 갤러리 전시에 다녀왔다. 사진들 옆에는 항해 중에 쓴 일기가 붙어있었다. 전시 제목은 'Salty diary of a girl at sea', 바다 소녀의 소금 맛 나는 일기인데... 정말로 일기에서 짠내가 났다.ㅋㅋ 근데 그래서 참 좋았다. 마냥 화려하기만 한 것보다 훨씬 더.
'태평양의 점'이 되어보고 싶었다던 그녀의 항해일지는 아주 멋지고 환상적인 일만 그리고 있지 않다. 요트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건 꽤나 간지 나는 일 같은데, 그녀의 일기는 그 '간지'를 얘기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태평양 한가운데서도 그녀는 사람을 관찰하고, 작고 소소한 것들에 신경 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충실하게 들여다본다.
바다의 아름다움을 매료되었다가도 나눌 사람이 없어서 외롭고. 지치고. 집에 가고 싶어 하고. 힘들어하고. 그런 모습들을 사진과 글 속에 숨기지 않고 거리낌 없이 담았다. 도시의 인간관계에 조금 지친 상태로, 자신의 두려움을 깨고자 더 큰 두려움을 마주하기 위해 항해를 결심했다지만, 그녀는 떠나서도 사람 때문에 더 힘들었다며 웃었다. 수민이가 도슨트로 이런 얘기를 해줄 때 항해를 같이한 크루 멤버와 선장님도 같이 계셨는데 그분들도 이 얘기에 그냥 따라 웃었다.
그런 상황이 듣고 있는 입장에서도 너무 이해가 갔다. 친구랑 짧게 여행가도 힘들 때가 있는데,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5개월간 태평양의 요트라는 극한 환경에 있다면 오죽할까. 그런데 그 짠한 순간들이 너무 공감이 갔다. 배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엄청난 모험을 하고 있는 사람의 글에서 언젠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일상 속에서 누구나 할법한 고민이 겹쳐 보이는 게 묘하게 위안이 되기도 했고. 사진과 글을 하나씩 천천히 보면서 때로는 웃었고, 때로는 찡했다.
영어로 쓴 일기, 한글로 쓴 일기를 둘 다 읽었는데 아주 살짝씩 의미가 달랐다. 느낌은 비슷했지만. 둘 다 수민이가 직접 쓴 건데 그 순간을 가장 잘 표현하는 형태로 쓰여 있었다. 나는 꼬물꼬물 손그림들이 특히 좋았다 ㅎㅎ 왼쪽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느껴졌다는 그림. 오른쪽은 배 앞에서 혼자 춤추는 본인의 모습.
전시장을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이 문구였다. 'Make your own waves'. 불침번의 방이라고 해서 작고 어두운 방바닥에 작은 공들이 깔려 있어서 들어가 돌아다니면 파도소리를 내는 방 위에 적혀있던 문구. 나는 이 문구가 맘에 들었다.
우리 몸 안에도 언제나 파도가 치고 있다.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면서 호흡을 느껴보면, 숨을 들이 마시면서 밑에서부터 올라왔다가 내쉬면서 다시 쭈욱 하고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파도처럼 왔다 갔다.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결국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아무 생각이 안 나든 온갖 잡생각이 다 떠오르든 아무런 관계없이.
'나만의 파도소리를 만드는 법'이란건 곧 나만의 시선을 갖는 걸 의미하는 것 같다. 근데 이게 어려운 게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들어있다. 소라를 귀에 대면 파도소리가 나는 것처럼, 나만의 파도소리란 곧 나에게 귀 기울여보는 걸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만의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전시도 그렇고 내가 임수민이란 사람과의 이야기와 사진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만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민낯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누군가는 그냥 쓱하고 지나칠만한 장면을 찾아내는 시선. 작은 것들을 관찰하고, 사소한 것들을 '사진'이나 '글'이란 매개체를 통해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찬란하게 비춰주는 그녀의 시선이 좋다.
그녀가 직접 쓴 글로 마무리. 전시를 본지 며칠이 지난 후 또 읽어도 좋다.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외로움과 그리움에 허덕이며 항해가 끝났다. 다행히 우리는 모두 무사히 돌아왔고, 모험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강해져서 돌아오고 싶었던 내게 있어서 이번 나의 모험은 실패였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나의 진짜 모험은 5개월의 항해가 끝난 후 그동안 찍은 94 롤의 필름을 현상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아, 나는 이런 것들을 보고 왔구나. 아 우리는 이토록 기쁘고도 힘들었구나. 아, 정말 우리의 여름은 찬란했구나.
사진들을 보며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그때 우리는 모두 외로웠다. 모두가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싫어도 함께 했고 우리는 지쳐도 함께 했다. 미우면 등 돌리는 그런 아쉬움 없는 관계들의 연속인 도시에서 벗어난 태평양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 했다.
육지를 보면 10대도, 20대도, 30대도, 40대도, 50대도, 모두가 똑같이 기쁘고 날뛰었다. 요리를 할 시간에는 10대 20대도 30대도 40대도 50대도 모두가 태우고 싱겁고 맛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웃었고, 뒤쳐지는 누군가가 있어도 그래도 우리는 기다렸다.
모험은 사실 굉장히도 일상적이며, 사실은 일상 속에서 모험이 시작되기도 한다.
단순하고 사소한 궁금증을 그대로 흘러 보내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그 어디에서나 21세기의 집시가 되어 나만의 항해를 떠날 수가 있지 않을까?"
- 임수민
+ps. 사석에서 우리가 나눴던 대화들 중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
융: 알을 깨고 나왔다는 말 있잖아
쑤: 데미안!! 그 책 너무 좋아해!!
융: ㅋㅋㅋ 그런 기분을 처음 느낀 건 언제였어?
쑤: 아. 첫 번째는 아무래도 사진을 시작하게 됐을 때.
융: 그러니까 그 시작이 궁금해.
쑤: 대학교 때 교환학생을 가게 됐는데 그동안 너무 열심히 살아서 진짜 '그냥 놀자'는 목표를 세웠어. 그때 내가 생각했던 제일 쓸모없는 수업이 암실 수업이었어. 요가든 뭐든 뭔가에는 좋잖아. 그런 것도 말고 그냥 실용성 없는 쓸모없는 무언가가 하고 싶었거든.
사진 수업도 아니고 암실에서 현상하는 수업이었는데 내 첫 필름롤이 완전히 하얗게 나와버린 거야. 근데 그 실패가 너무 좋았어. 버튼만 누르면 뭐든 되는 세상에서 내가 하나하나 다 움직여야 하고 불편한데 그 망한 필름 때문에 오히려 내가 처음으로 뭔가를 했다고 느껴졌어.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
두번째 알을 깨고 나온 시기는 지금인 것 같아. 이게 자주 오는 기분은 아닌데 이런게 느껴질 때마다 너무 좋아.
융: 맞아 :)
융: 전시에서 영상 보는데 네가 말하지 않았던 바다 위에 무지개랑 노을 보고... 와 진짜...
쑤: 노을... 노을은 진짜 뜨거웠어. 얼굴이 뜨거워지는 색이었어. 그건 진짜 경이롭더라. 겸손해졌어 나 자신이.
태평양에서 원주민들이 사는 섬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많았어. 영어도 불어도 안 통하고 아예 말이 안 통하는데, 내 팔에 태양 타투가 있잖아. 그걸 가리키고 '썬'이라고 하고 나를 가리키면서 '쑤'하고 알려줬어. 그랬더니 애들이 이름을 한 명씩 말하더라. 그리고 손으로 하트 모양을 하고 '사랑해'를 알려줬어. 그런 식으로 말이 통하더라고.
돌아갈 때쯤 꼬맹이 하나가 머리끈을 줬어. 배를 타고 돌아가는데 꼬맹이들이 섬에서 계속 내 이름을 외쳤어. 쑤! 쑤! 하고. 근데 어디서 자꾸 코코넛 냄새가 나는 거야. 배는 자꾸 섬에서 멀어지는데도. 알고 보니까 머리끈에서 나는 거였어. 이 원주민들은 머리에 계속 코코넛 오일을 바르고 다니는데 그 머리끈에 코코넛 냄새가 배서... 그게 얼마나 나한테 소중했는지 몰라. 너무 소중해서 머리끈을 일기장에도 끼워놨었어. 그래서 나중엔 일기장에서도 코코넛 냄새가 나고(ㅎㅎ) 배 위에서 그리움이 찾아오면 머리끈에서 코코넛 향을 맡곤 했어.
배를 타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야 돼. 진짜 깜깜해. 내가 내 손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해서 내가 없어질까 봐 무서웠어. 근데 또 달이 뜨면 너무 환해서 잠을 못 자. 바다에 달빛이 비치는데 너무 환하고 단단해 보여서 그 위를 걸어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져.
무인도에 갔을 때 나는 제일 가져가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막상 무인도를 가보니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은 다 있는 것 같아. 코코넛이든 뭐든 있는데. 무인도에 가니까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더라. 추억. 그게 없었다면 나는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아.
- '태평양의 점'이 되어보고 싶다던 꿈을 이룬 그녀는 또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멋지고 의미 있는 꿈을.
- 캐논 전시는 아쉽게도 10월 29일로 끝이 난 상태입니다 ㅠㅠ 그래도 첫번째 컬러 전시회! 가 11월 20일까지 라이카 스토어 강남점에서 진행 중이네요.
- 사진도 사진이지만, 글에서도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과 글 모두 이곳에 :)
https://www.instagram.com/sooeatsyourstreetforbreakfast